등록 : 2011.07.06 19:28
수정 : 2011.07.06 19:28
|
고 김희상
|
가신이의 발자취 김희상 민청련 초대 대변인
암흑시대 1970년대, 박정희 병영국가에서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허덕였다. 구로와 마산공단에서 ‘공돌이’들은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청계천 다락방에서 ‘공순이’들은 폐 속 깊이 먼지를 마시며 미싱을 돌렸다. 군사독재권력은 시민들에게 침묵과 복종만을 강요했다. 자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반정부’, ‘반국가’ 행위였다. 그러나 여기에 저항하는 양심들이 있었다.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했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의 덫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5일 세상을 뜬 김희상(사진) 선배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서울 신일고를 졸업하고 73년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희상은 마음이 여린 학생이었다. 그는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갈등하고 고민했다.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심지는 굳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해 박정희 정권과 싸움에 나섰다. 그는 79년 유신정권이 종말을 거두던 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소한 뒤 박정희의 후계자, 80년 5월 광주학살을 지휘한 전두환과의 싸움에 몸을 던질 결심을 했다. 그는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년 창립) 집행부에 참여해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때부터 이미 김 선배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건강이 먼저라며 요양을 권고했지만 선배는 결코 자기 몸을 누이지 않았다. 민청련 활동을 하면서 경찰서에 끌려가기를 밥 먹듯 했다. 결국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1년 남짓 동안 감옥에 갇혀 두번째 옥고를 치러야 했다. 몸은 더욱 망가졌다. 대학시절과 민청련 시절 내가 지켜본 선배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머뭇거림 없이 실천에 옮기는 이였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김 선배를 비롯한 민주투사들 덕분이다. 이들이 고문당하고 감옥 가고 한 결과이다. 56살 이른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김 선배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일구는 데 참여했다는 자부심만은 넘쳤을 것이다.
아마도 김 선배가 병상에서 가장 가슴 아파 했던 것은 자신을 포함해 선배들이 피 흘리며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가 뒷걸음치고, 서민들의 삶은 어려워지고, 남북간 무력충돌의 위험마저 느껴지는 지금의 우리 현실이었을 것이다. 김희상 선배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최경환 민청련동지회 회장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