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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19 17:18 수정 : 2011.10.19 17:18

고 김태홍 전 의원(민주당)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죽어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 이는 존재에 대한 어느 전문가의 말씀이다.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볼 때 그럴싸하다. 그러나 살면서, 특히 가까운 이의 죽음을 대하면 이 말씀을 흔히 잊게 된다. 오감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김태홍 전 한겨레신문 이사의 죽음을 접하면서 슬픔과 아쉬움을 깊이 느끼게 된다.

김 전 이사가 지난 1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69세. 고인은 <한국일보> <합동통신> 기자를 거쳐 한국기자협회장,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공동대표, 한겨레신문 이사 등을 지냈다. 1980년 한국기자협회장으로서 주도한 언론검열 철폐 운동과 1987년 보도지침 폭로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말>지 발행,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는 등 언론자유 운동에 헌신했다. 제1회 가톨릭 언론인상을 받았다. 고인은 오십이 넘어 정치에 입문해 광주광역시 북구청장, 제 16, 17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윤리위원장, 한·미 FTA를 연구하는 의원모임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광주 북구청장과 8년 동안의 국회의원 생활 동안 정치 민주화 등에 노력했고 제3회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은 부인 최정숙씨와 2남1녀가 있으며 광주 망월동에 영원한 거처를 정했다.

 김 전 이사를 <합동통신> 편집국에서 처음 만난 때가 1975년 가을이다. 30년 넘게 이런저런 일을 같이 겪었지만 고인에 대한 기억은 독재자의 언론 탄압이 자심했던 시절에 주로 몰려 있다. 박정희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기관원이 언론사를 휘저을 때 고인은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컸고 언론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고인은 10·26 직후 기자협회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며 한국기자협회장에 도전했고 당선된 뒤 정부기관원의 사무실 출입을 금지시켰다. 기협 출입문에 ‘기관원 출입금지’라는 글을 써붙인 것이다. 정치군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고인은 계엄당국의 검열로 보도되지 못한 많은 기사들을 모아 등사판으로 작은 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80년 5월 중순 기협이 총회에서 검열거부 제작거부 결정을 한 뒤 신군부는 광주학살을 시작했고 고인은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체포되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묶여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근안의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이 고인을 최근 수년 간 괴롭힌 루게릭병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전국 대부분 언론사 기자들이 검열, 제작거부 투쟁을 벌여 1천명에 가까운 언론인이 불법 해직되었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고인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몸담은 뒤 <말>지 창간에 동참해 당시 제도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뉴스를 보도하는 데 열정을 바쳤다. 86년 고인이 몇 사람과 함께 제작한 보도지침 폭로는 전두환 정권과 시민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87년 6월항쟁 기폭제의 일부가 되었다. 군부독재의 언론 탄압 실상이 낱낱이 폭로된 것이다. 이 ‘보도지침 사건’으로 고인은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고인은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경영 부문 등에서 헌신적 노력을 했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구청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구청 담을 허물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등 시민과 가까워지는 정치를 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정치 상황에서 이 또한 파격이었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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