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05 20:06
수정 : 2011.12.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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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인철 전 ‘한겨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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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이인철 전 ‘한겨레’ 논설위원을 보내며
이인철 형, 형이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우리 동아투위 홈페이지에서 읽고 형을 문병 간 것이 지난 수요일 낮입니다. 호스피스병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불안한 느낌이었지만, 말씀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시는 형의 모습에 가슴이 콱 막혔습니다. 상투적인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 뒤 곁에서 수발하시는 형수님의 해설을 통해 그동안의 투병 경과를 들었습니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견디는 형의 투지에 의사들도 놀라더라고요?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더는 보기 어려워 헤어지던 순간, 저는 형이 내미는 두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형, 우리는 조만간에 다 그곳으로 가는 거요!” 형은 알아들었다는 듯 그 야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어루만지셨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냉엄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봄바람처럼 훈훈한 것이 형의 성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인다운 풍모였죠. 남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 한번 붉힌 적 없는 형이지만, 박정희 유신독재 앞에서는 결연히 맞서 젊은 후배들과 함께 자유언론 실천에 나섰습니다. 그것이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에서 일어난 ‘자유언론실천선언’입니다. 그때 형은 외신부 차장으로 4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다른 선배들처럼 모른 척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은 75년 3월 많은 젊은 기자들이 동아일보사에서 무더기로 쫓겨날 때, 쫓겨나는 젊은 기자들 편에 섰습니다. 자녀를 셋이나 둔 처지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었죠.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형은 종로1가 종각 앞에 번역실을 차렸습니다. 젊은 기자들과 함께 호구지책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형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종각번역실’로 불렸던 이 사무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된 동아투위 후배들이 종로통을 오가다가 들러 지친 다리를 쉬기도 하면서 동지들끼리 서로 격려함으로써 투지를 재충전하는 기지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88년 5월15일 동아투위·조선투위·80년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된 새 신문 <한겨레>가 창간됐을 때 형은 13년간의 해직기자 생활을 끝내고 언론 현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당초 우리가 투쟁해 왔던 원직복귀는 당당하게 <동아일보>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의 파렴치한 외면 속에 동아투위 위원들은 여전히 ‘동아 해직언론인’으로 36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형은 <한겨레>에서 편집부위원장과 논설위원, 심의실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젊은 날 중국문제 전문가로 필명을 날렸던 형은 특히 <한겨레> 논설위원 때 남북문제를 전담하셨습니다. 평북 영천 출신인 형이 쓰신 남북관계 사설이나 칼럼은 실향민의 절절한 정서가 반영됐음인지 큰 반향이 일었던 것이 기억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대 파국을 맞고 있습니다. 때마침 보수언론의 종편 방송이 민주제도의 근간이 되는 여론의 다양성을 무참하게 짓밟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형은 민주주의와 민주, 민족 언론을 향한 못다한 한을 품은 채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뿌린 자유언론의 씨앗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적 정론지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인터넷 매체와 사회관계망(SNS)에서 맹렬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의 복원력을 믿읍시다. 한번 자유를 맛본 국민들은 결코 노예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인철 형, 이제 세상일은 세상에 맡기고 당신이 섬기던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장윤환/동아투위 후배·전 <한겨레>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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