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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9 20:02 수정 : 2012.03.29 21:03

허병섭 목사

가신이의 발자취
‘가난한 이의 벗’ 허병섭 목사를 보내며

병섭 형! 참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1974년 당신과 신설동 판자촌에서 인연을 맺고 형님 아우 하며 가난한 사람도 ‘사람대접’ 받고 사는 희망세상을 꿈꾸었던 때가 벌써 40년이 가까워 옵니다. 목사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이웃 형처럼 다가온 병섭 형은 저를 향해 단 한번도 “교회 나와라” “예수 믿어라” 권하지 않았습니다. 75년 초 유신 찬반을 묻는 선거 때로 기억됩니다. 부정선거를 고발했다는 괘씸죄로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병섭 형께서 면회를 와 슬그머니 성경책 한 권 넣고 가셨습니다. 당신께서 넣어준 성경책은 제가 남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 한권을 읽어보는 기회였고 훗날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을 세상에 발표하는 발판이 됐습니다.

그때 성경을 읽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처음 만나게 됐고 예수를 만나는 순간부터 완전 매료되어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뒷골목 깡패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진짜 깡’이 센 왕초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각박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도저히 피울 수 없는 시든 꽃! 초등학교 졸업 학력, 지체장애인, 뒷골목 건달이라는 구차하고 초라한 경력뿐이었던 저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변화시켜준 당신입니다. 어리석은 삶을 살아온 저를 이 자리까지 서게 만들어준 당신입니다.

나 혼자만 잘살면 된다는 비틀어진 이기심으로 가득 찬 저에게 사랑으로 따듯하게 다가와 “더불어 함께 잘사는 것이 진정 잘사는 것이다”라는 깊은 뜻을 깨우쳐 준 병섭 형! 오늘따라 당신에게 세례를 받은 암울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태산 같은 감동의 기도를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감사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당신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미 철거되어 어지럽고 황량한 중랑천 뚝방 철거촌에서 당신께 세례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던 그때 그 생생한 기억들은 설령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사랑의 생수로 세례를 주시던 당신의 진지한 모습과 따듯한 사랑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당신의 잔잔한 가르침은 그 어느 가르침보다 무겁고 크게 다가왔고 온몸 구석구석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쓰러지기 일주일 전 저에게 찾아오셔서 식사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장로를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절망 중에 방황하는 단 한명에게라도 희망의 끈을 잡게 해주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이 장로는 그런 일을 잘 해내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당신의 소망이 가득한 격려의 말씀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말문이 막혀 먹먹할 뿐입니다. 비록 당신은 가셨지만 당신의 정신! 당신의 사랑! 당신의 믿음! 당신의 소망은 곳곳에 전해질 것이라고 믿고 확신합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힘들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갈릴리 해변으로 발길을 옮길 것입니다. 그곳에 당신이 계실 테니까요.

이철용 <꼬방동네 사람들> 지은이·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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