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4.30 20:25 수정 : 2012.04.30 21:50

1975년 11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명동성당 가톨릭학생회 소속 서울시내 대학생 23명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공판 거부를 선언한 뒤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서상섭(전 의원), 이명복(선경식 의원보좌관), 선경식(고인·창조한국당 대표), 윤서영, 정민수씨. 사진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가신이의 발자취] 선경식 창조한국당 대표를 보내며

푸른 5월을 눈앞에 두고 ‘선경식 동지’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숨막히는 유신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던 ‘선경식 동지’가 눈을 감았습니다.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그 뜨겁던 열정과 순정을 추억으로 남기고 ‘선경식 동지’는 눈을 감았습니다.

선 동지는 학창시절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학원 내 군사교육을 강화할 때 그는 가장 앞서 맞선 행동가였습니다. 결국 위수령이 발동되어 학원 안으로 탱크가 주둔하고 전국 각 대학 시위주동자 180여명은 제적되고, 대부분 군에 강제입영 되었습니다. 그 ‘71동지회’는 학계·정계·문화예술·시민사회에서 아직도 그 열정을 품은 채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 동지와 우리가 유신헌법을 반대하다가 서울구치소로 끌려갔던 때가 75년 6월이었습니다. 이른바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8명이 사법살인당한 바로 뒤였습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재판 거부를 함께 하고, 항소까지 포기한 것이 벌써 37년 전 일입니다. 결국 그는 박 대통령이 죽고 유신이 끝난 다음에야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자유도 잠시,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적 결말은 그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시대에 대한 분노를 남겨 주었습니다. 그는 광주란 시대적, 역사적 트라우마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분노를 넘어 그는 언론인으로 열심히 살았고,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열정을 정치인으로 넘어서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막바지에 창조한국당 대표로서 4개월의 짧은 의정생활을 하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혹독한 고문과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고 평생을 고생하다가, 19대 국회를 꼭 한 달 남겨 놓고 눈을 감았습니다. 제대로 된 의정생활도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우리 동년배들은 한국 현대사의 그 많은 질곡 속에서도 의연히 살아왔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하였고, 유신헌법을 반대하며 할복 자결한 김상진 열사는 유서에서 “나는 지하에서 동료들이 하는 일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동년배들은 역사에 부끄럽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초라할지라도 역사 앞에서는 떳떳하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선 동지의 짧은 의정생활은 초라할지라도, 역사는 그를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시대는 한 막을 내렸지만 선 동지는 민주화운동의 시대,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기록 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선 동지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많은 동지들과 함께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선경식 동지 편히 잠드소서.

최열/환경재단 대표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