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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08 19:57 수정 : 2012.11.09 17:43

조승복 박사

가신이의 발자취
스웨덴 스톡홀름대 조승복 교수를 기리며

1950년대부터 유럽에서 한국학 보급과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한민족 동질성 연구에 몰두해온 조승복(사진) 박사가 10월27일 ‘제2의 고향’ 스웨덴 웁살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90.

선생은 1922년 식민지 유민의 땅 연변에서 태어나 용정의 광명중학을 거쳐 만주국 관비장학생으로 일본의 제1고와 동경제국대학 서양철학을 수학한 수재였다. 그러나 일신의 특권과 영달을 꾀하는 대신, 민족과 조국에 봉사하는 길을 고뇌한 끝에 해방 이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원을 거쳐 52년 스웨덴에 정착했다.

대학도시 웁살라에서 우랄어비교언어학의 대가 콜린데르 교수의 연구조수로 시작된 그의 학문 역정은 철학에서 언어학으로, 다시 동양의 언어문화 연구로 이어져 갔다. 특히 우리말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57년 최초로 웁살라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고, 75년 국립 스톡홀름대학의 초대 일본학 정교수가 됐다. 89년에는 같은 대학에 북유럽 5개 나라 중 유일하게 한국학과와 정교수직을 설치함으로써 지역 일대의 한국어 강의와 시험을 관장할 수 있게 했다.

선생이 67년 웁살라대학에서 출판한 <한국어 음운론 연구>는 전세계 한국어 연구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더불어 한·중·일 3국의 언어·사상·문화를 관류하는 폭넓은 연구 활동과 저술로 유럽학계에서 권위있는 동양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7개 언어를 구사하며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세계 18개 명문대학에서 초빙강연을 한 석학이었다.

조 박사의 나라사랑은 분단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주화운동 지원으로 이어졌다. 우선 남한에서라도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을 염원하며 군사독재 시절 김지하 시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 93년 ‘우리문화 동질성 연구회’를 창립해 한민족 동질성 회복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평생을 통일주의자로 일관해 온 그의 신념은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분단조국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오랜 세월 남북 모두로부터 ‘친북인사’-‘반북인사’라는 오해와 경계를 받아야 했다.

돌이켜 보면 선생은 분단의 희생자였다. 그럼에도 그가 국외에서 쏟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공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제 분열과 대립이 없는 저승에서 편히 영생하시기 바란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는 자서전 <분단의 한-과거와 미래>(상·하, 2004년, 케리그마)에 상세하게 담겨 있다. 슬하에 부인 로즈(95년 작고) 사이에 딸 숙희, 아들 프레데릭 병호가 있다.

변광수/한국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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