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11.14 19:35 수정 : 2012.11.15 09:04

고 조호걸 전 민중당 기획위원장

가신이의 발자취
조호걸 전 민중당 기획위원장을 보내며

일본에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에서, 그의 삶은 개혁과 보수의 다툼을 배경으로 오로지 일본의 장래만을 생각하면서 온몸으로 시대와 맞서다 30대 초반에 유명을 달리한 풍운아로 등장합니다. 제 과문함 때문이겠지만, ‘한국의 료마’라는 이름보다 형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을 못 찾겠습니다.

1980년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가 연세대에 갓 입학했을 때, 1년 선배인 형은 유신 독재치하 학생운동 중심의 하나였던 탈춤동아리 회장이자, 경제학과 학회를 만들어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과 폭압정치에 맞서 싸운 끝에 감옥에 갔습니다. 이후 그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 노동현장으로 향했습니다.

형을 다시 만난 것은 87년 6월항쟁 직후 민주화운동의 발전 경로를 두고 백가쟁명이었던 무렵이었습니다. 형은 진보진영이 스스로 권력의지를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중당 기획위원장으로서 창당을 이끌어내고 ‘독자 후보’라는 의미 있는 역사의 물꼬를 텄습니다. 이때부터 형에게 ‘한국의 료마’다운 풍모가 엿보이기 시작했지요. 진보진영의 독자세력화 시도가 92년 민중당의 해산과 함께 중단된 이후에도 형은 치열한 독서와 사색과 토론으로, 좌우를 아우르며 사회현실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한번도 이름이나 명예를 다투지 않고 늘 든든한 배경과 그늘이 돼주던 형이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지난 일요일 혼자 맨몸으로 운동하러 나갔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으나 신원 확인이 늦어 제때 수술을 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습니다. 늘 부러움과 존경심마저 안겨줄 정도로 지극했던 부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말입니다.

그러나 형이 뿌린 변혁의 꿈은 우리 사회의 진보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호걸남아’였던 조호걸 형님. 못다 이룬 꿈일랑 이제 다 내려놓으시고, 자유의 영혼으로 바람처럼 지내시다가 훗날 못난 후배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주소서.

최병현/유신잔재 청산과 역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 대변인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