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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19 19:11 수정 : 2013.08.19 20:58

고 백원길 배우 겸 연출가

가신이의 발자취
백원길 배우 겸 연출가

원길 형! 형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나흘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형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아. 어딘가 몰래 틀어박혀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것만 같아. 나는 항상 사는 일이 셀 수도 없는 실험이고 시도라고 생각해왔어. 대부분 헛되이 그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축적되면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 열리리라는 믿음으로 말이야. 그게 형과 내가 닮은 점이었어. 가끔 그 믿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 눈 앞에 어마어마한 폭죽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상상을 하곤 했잖아. 우리가 함께 만들어 세계인들을 웃겼던 <점프>와 <플라잉>, <비밥>, <젠>, <비트> 같은 넌버벌 퍼포먼스가 그 폭죽이었을 거야. 그런데 지금, 형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하늘로 날아올라야 할 그 화려한 폭죽의 도화선이 사라져버렸어.

형은 때로 심술 고약한 할아버지 같았어. 특히 배우들에게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못되게 굴기도 했지. 형이 그럴수록 후배들은 더욱 형을 사랑했어.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쌩뚱맞은 연기를 시켜놓은 것 같은데 막상 무대 위에서 한 장면으로 엮어보면, 모두가 너무 재미있어서 떼굴떼굴 구르는 상황도 종종 있었어. 그럴 때마다 나는 형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궁리해야 저런 장면들이 만들어질까 스스로 묻곤 했지.

형은 늘 낚시를 즐겼어. 가끔 함께 낚시를 가면 몇 시간이고 묵묵히 앉아서 찌만 응시하곤 했지. 그 모습은 무척이나 고요했지만 형의 머리 속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어. 그러다 형은 갑자기 “이거 어때?” 하며 소리를 질렀어. 그렇게 낚아 올린 장면들은 등푸른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면서 내 머리 속을 황홀하게 만들곤 했지.

사고 이틀 전에도, 우리는 내년에 올릴 작품 이야기를 했지. 형은 기가 막힌 코미디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 했어. 이미 그림이 다 그려졌다고 했지. 쓰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작업실이자 휴식처인 강원도 양양의 오두막에서 한 달만 쉴 수 있다면 내 눈 앞에 보일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원길 형! 우리가 처음 회사를 만들 때 형은 ‘쾌락의 정원’을 주장했고, 나는 ‘페르소나’를 고집했어. 몇날 며칠을 술을 마시면서 토론했고, 언제나처럼 형이 져주었지. 지금 형은 작업실을 하늘로 옮기느라 분주하겠지. 새로운 작업실에는 ‘백원길의 유쾌하고 즐거운 정원’이라 새긴 간판을 달아주고 싶어. 그 정원에는 아마 큼직한 연못도 있을 테고 유쾌하고 즐거운 물고기들이 형이 던진 낚싯바늘을 몇 시간이고 희롱하겠지. 듣고 싶어. 느닷없이 “이거 어때?” 지르는 형의 목소리를. 보고 싶어.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장면들을.

최철기/뮤지컬 연출가·페르소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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