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19 19:26
수정 : 2013.12.1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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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도잔소회의 25돌 기념행사에 함께한 1세대 에큐메니컬 운동가. 왼쪽부터 고 오재식,강문규박사,박상증 목사,박경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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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YMCA 전 사무총장 강문규 형에게
1965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간사를 맡았을 때 돌아가신 강원용 목사님을 통해 강문규 박사님과 인연을 맺었다. 우리는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에서 선후배로 의기가 잘 통했다. 훨씬 선배였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에 죽기 전까지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거의 반세기를 같은 길을 걸어왔다. 특히 내가 18년간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으로 있을 때 형은 국제위원회의 커미셔너와 부의장으로서 제네바에서, 뉴욕에서 , 아시아 곳곳의 현장에서 늘 같이 했다.
우리는 세상의 발전 법칙은 제3의 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합리적 보수와 이성적 진보는 선진화의 두 개의 축이라고 생각하면서 늘 비판적인 협력(크리티컬 콜라보래이션)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소통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양보를 모르는 수구보수와 파괴적인 급진진보 세력이 너무 설치는 결과이므로 이들을 계몽하고 양보를 유도해야 하는 게 시민운동이라고 보았다. 이 두 세력을 어울러 제3의 길로 도약하는 게 발전 법칙이라고 믿고 일해왔다.
우리는 지난 1986년 분단 41년 만에 최초로 남북교회 대표가 세계교회협의회 주선으로 스위스 그리온에서 만난 이래 92년까지 수차례 만나 화해와 양보를 신앙으로 고백하면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함께 기원하도록 주선했다. 특히 형은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 와이엠시에이(YMCA)운동, 지구촌 나눔운동 등을 통해 북한이나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들을 도와왔다. 이 모두가 에큐메니컬 신앙고백에 따른 실천의 삶이었다.
지난해 12월엔 새해 100돌을 맞는 와이엠시에의 미래 지도자 양성에 써달라며 남은 재산 3억5천만원을 선뜻 내놓아 내가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형은 널리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고 강문규 형은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대부이다. 시민운동의 본질은 자발성의 유도이고, 시민운동가들은 앞장서 이끌어야 한다는 철학을 몸소 실천했다. 98년부터 5년간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맡아 “새마을운동은 관변 단체의 시민운동이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수혜자 중심의 인권에 입각한 개발을 유도해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철학으로 그는 와이엠시에이 사무총장 시절 농촌의 양곡은행운동, 마이크로-크레딧운동, 참교육운동 등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지난 수개월간 그의 투병을 지켜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아프다고 찡그리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 때 방한한 지구촌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주었을 때 환하게 웃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세계교회협의회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ACC)는 19일 보내온 애도문에서 “우리 세계교회는 오늘 위대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를 주님의 품에 보냅니다. 강문규 박사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일생을 민주화운동, 인권을 위해 공헌한 분입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해 늘 고심하면서 실천하신 공을 우리는 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그의 화해 나눔의 실천은 북한, 동티모르, 몽고,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그리고 미얀마의 가난한 사람들은 늘 감사하면서 기억할 것입니다. 가족들과 특히 부인 김숙자 교수에게 주님의 평안을 기도드립니다”라고 전해왔다.
형은 평소 군더더기나 거품을 싫어했다. 상식의 선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다. 허풍이나 일회성 이벤트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오해도 가끔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이가 그를 존경하게 되곤 했다. 정의·평화·생명·창조질서의 보존을 삶의 신조로 삼은 ‘당신’을 우리는 오래 오래 기억하면서 가슴에 간직할 것이다.
박경서
초대 대한민국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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