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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06 19:30 수정 : 2014.05.06 22:29

고인(박준규·오른쪽)과 필자(남재희·왼쪽)는 1989년 8월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과 중앙위 의장으로 함께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가신이의 발자취
박준규 전 국회의장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되는 자리라는 그 국회의원을 9선. 그 기록은 연령순으로 박준규 김종필 김영삼씨, 3명뿐이다. 그들은 이합집산하며 항상 라이벌이었다. 박준규씨의 빈소는 붐비지 않았다. 더 큰 병원이 있는데 굳이 순천향병원이다. 그리고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했음에도 가족장을 유언했다니 과연 탈속한 인물이다. 리버럴에 관한 해석이 구구하지만 우선 여하간 어깨에 힘을 안 주고, 권세 있는 자리에 있어도 평범하게 처신하는 인간이 그런 게 아니겠는가.

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의 강사였다가 유석 조병옥씨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임을 내세웠고, 처가도 조지훈씨 문중이며, 자형은 백남억씨니 속된 말로 명문이다. 의대에 다니다가 정치학과로 방향을 튼 특이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4·19’ 뒤 민주당 구파의 소장파들은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들어 푸른 제복을 입고 설쳤다. 박준규·김영삼 의원이 두드러졌다. 그러다가 ‘5·16’. 한 사람은 박정희 공화당의 핵심으로, 다른 한 사람은 야당의 주류로 부각된다.

공화당의 당의장이 되었을 때다. 그는 당시 진보 정당인 통일사회당 김철 당수의 축하 화분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만 자기 스타일에 맞는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의 칼손 총장이 왔을 때 그 환영행사에 굳이 참석해 ‘옹고집’ 김철씨의 냉대를 받았다. 김철씨는 여당의 당의장인 그에게 인사말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일본 사회당의 서기장 일행이 방한해 면담을 요청했을 때에는 북한만 승인한 괘씸한 정당이라고 외면해버렸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씨가 대선에서 경합할 때다. 민기식·정승화 장군 등 군 출신, 박준규·문태준·김창근씨 등 여당 출신은 김영삼씨를 밀기로 한 듯했다. 그러다가 티케이(TK)의 인맥은 어쩔 수 없었던 듯 박씨 등은 노태우 쪽으로 돌아섰고, 민 장군은 주저앉았으며, 정 장군만 초지일관했다. 박씨는 자기가 끌고 간 사람들을 장관 자리에 주선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책도 냈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리버럴이기를 원했다. 큰 눈을 겁보처럼 굴리지만 못된 짓은 안 한다.

민정당 대표위원 때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 대통령을 깍듯이 대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어떤 고위층이 노 대통령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꼴을 보이자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그 사람, 와 우노. 그러니 나도 우는 척 안 할 수 없지….” 서양에서는 리버럴을 ‘센스 오브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 한다.

정계 막판에 청조회 운동을 함께했던 김영삼 대통령과 드디어 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재산공개 파동 때 ‘팽’당하는 꼴이 되었다. 끝내 라이벌이다.

그는 위인전에 남을 만한 강한 소신이 있는 정치인은 아니다. 몸은 항상 정치의 주류에 있었으니 나라 발전의 주체였다고 자부할지도 모르겠다. 투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봉 상스’(양식)가 있는 정치인이었다.

“우에 그리 칭찬하노?”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 같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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