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10.26 19:46 수정 : 2017.10.26 21:53

[가신이의 발자취]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김아멜리아 수녀 영전에

?지난 1월초 잠시 고국을 방문한 최종선(오른쪽)씨가 경기도 여주 마리아의 집에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김아멜리아 수녀(왼쪽)를 찾아가 ‘친형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대한 양심선언 수기’에 얽힌 일화를 나누며 감사의 뜻을 나누고 있다. 고인과 마지막 만남이 됐다. 사진 최종선씨 제공.

“1973년 10월26일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후일을 위해 형님의 죽음에 대한 오늘의 한을 생생히 남겨 두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형님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워 대대적으로 보도한 어제 저녁, 쇼크를 가장하여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감시 범위 속에 남아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내가 뜻하는 글을 제한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앞으로 우리 가족 또는 고인의 동료 교수, 제자들에게 또 다른 위해가 가해질 경우 공개될 것으로서, 나의 최후의 글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진실 이외 아무 가식도 없는 나의 유언인 것이다.”

이 글은 1973년 10월19일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서 숨진 나의 형,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고문치사 진상을 밝힌 나의 ‘양심선언 수기’ 첫머리다. 나는 1974년 12월31일 자정 무렵, 천주교 응암동 성당으로 숨어들어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수기’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 자신 이미 독재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던 함 신부는 75년 여름께 성당에서 시무하던 수녀에게 맡겼다.

40여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에서 목숨을 걸고 이 위험한 문서를 간직해 세상에 무사히 공개하게 해준 김아멜리아(김옥기·85) 수녀님이 지난 22일 오전 주님 곁으로 떠나셨다. 20여년 전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사는 까닭에, 비보를 듣고도 달려갈 수 없어 짧은 글로나마 추모하고자 한다.

1973년 10월 몰래 쓴 ‘최종선 수기’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에 맡겨
75년 응암동성당 시무 수녀들 ‘보관’

다시 명동성당 홍인수 신부에 전달
89년 ‘최 교수 첫 추도회’ 무사히 공개

말기암 연명치료 않고 선종…향년 85
“삶과 죽음 초월한 맑은 모습에 경건”

‘그해 여름 피정을 다녀와서 정멜라니아 수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샬트르 수녀원의 선임으로서 제가 서류를 맡겠다고 했습니다. 고심 끝에 ‘양심선언’을 비닐로 여러 번 싸맨 뒤 성당의 수녀원 옆에 있던 장독대의 소금 항아리 속에 깊숙이 묻어 두었습니다.’ ‘1976년 ‘3·1 명동성당 구국선언’으로 함 신부님이 도피하다 구속된 뒤 중정 요원들의 압수수색과 사복경찰들의 감시망을 뚫고 사과상자에 문제 될 만한 서류와 양심선언문을 넣어 비밀리에 명동성당 주교관으로 가져갔어요. 함 신부님의 동기동창이자 김수환 추기경님의 비서였던 홍인수 신부님에게 전달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아슬아슬하게 양심선언문이 살아남은 것 같아요.’

지난 5월 출간된 <만들어진 간첩-유럽거점간첩단 사건, 그리고 최종길 교수 죽음의 진실>(김학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에 실린 김아멜리아 수녀님의 증언이다.

그런 숨바꼭질 15년 만인 1989년, 나의 수기는 다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함세웅 신부님을 거쳐 <평화신문> 편집국이던 김정남 선생님에 의해 햇빛 속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archives.kdemo.or.kr/isad/view/00480350) 누리집을 통해 누구나 수기 원문을 공개 열람할 수 있다. 여기에 어찌 천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이 함께하지 않으셨다 할 것인가?

2001년 봄 서울시청 앞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1인시위를 할 때, 고 장준하 선생님의 둘째 아들 장호성씨의 탄식도 새삼 떠오른다. “고 최종길 교수님께서는 동생의 ‘양심선언 수기’가 남아 있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한을 풀 수 있지만, 저희는 그런 게 없어 진상을 밝히기 어려우니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네요.”

‘박정희 독재정권 의문사 1호’인 형님의 죽음이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에 작은 초석이나마 될 수 있었다면, 그때 그 시절 김아멜리아 수녀님 같은 분들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임을 지금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훗날 함 신부님께 전해 들은 김아멜리아 수녀님의 삶은 열린 신앙과 역사적 소명을 위해 헌신한 한평생이셨다.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수녀님은 53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 입회하셨고,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을 비롯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 대한 옥바라지는 물론 가족들의 아픔까지 껴안아 주신 민주화운동의 유공자이셨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신 적도, 조명을 받은 적도 없으셨다.

지난 1월 초, 잠시 한국에 머물며 여주 마리아의 집으로 찾아뵌 아멜리아 수녀님의 마지막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말기암 진단을 받고도 항암치료는 물론 아무런 생명 연장 노력을 하지 않고 계셨다. 그저 조용히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다. 맑고 깨끗하게, 아름답고 품위 있게, 죽음 앞에 서는 모습에 옷깃을 여미며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아프다. 좀 더 사실 줄 알았는데, 아니 다시 한번 찾아뵙게 되기를 기대했었는데….

제게 죽음을 맞는 자세까지 가르쳐주신 김아멜리아 수녀님, 이제는 주님 곁에서 행복하옵소서.

워싱턴디시/최종선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