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7.02 20:36
수정 : 2018.07.0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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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고 김희숙 여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1967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워 가장 먼저 반유신 투쟁에 나섰던 백 소장은 지난 4월23일 심장수술을 한 이후 회복중에 첫 외출을 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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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김희숙 형수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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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고 김희숙 여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1967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워 가장 먼저 반유신 투쟁에 나섰던 백 소장은 지난 4월23일 심장수술을 한 이후 회복중에 첫 외출을 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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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장호권이로부터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 얼굴엔 그야말로 피눈물로 범벅이 돼 앞이 안 보였다. 장준하 선생님과 한살매(일생)를 같이 해온 김희숙 형수님이 내 눈자위를 마구 후벼 파신다. 한참을 펑펑 울다가 눈물을 거두고 붓을 들었으나 앞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바로 두 달 앞서다. 무슨 일로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데 병상의 꿈에서 형수님의 한마디에 번쩍 깨어났다. “이봐 백기완이, 우래옥에 가서 냉면 한 그릇 산다더니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해, 어서 일어나.” 이 말에 눈을 뜨고 나서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마 1960년 말쯤일 거다. 장 선생님과 함께 등산을 갔는데 너무나 힘이 들어 내 윗도리를 벗어 형수님 등에 올려놓았더니 비웃으시는 것 같아 나도 반격 아닌 목소리를 돋구었다. “나는 요, 해방통일의 짐만 지지 이따위 옷가지는 아니 지거든요.” 그러자 형수님 말씀이 “통일의 짐 따로 있고, 힘들 때 지는 짐 따로 있다던가.” 나는 귀싸대기가 얼얼, 그때부터 나는 이따금 장준하 형님한테는 가슴을 들이대는 적은 있었어도 형수님한테는 늘 말을 골라 하곤 했다.
1973년 어느 추운 날, 등산에서 내려오시던 장준하 선생님이 청평호에서 ‘빠른 배’(모터보트)를 한번 탈 수 없을까 그러신다. 그날 함께 갔던 배기열 교수 보고 빠른 배를 탈 잔돈이 있느냐고 하니 있다고 한다. 서둘러 내려갔으나 그날따라 꽁꽁 얼붙어 뜻을 못 이루고 어느 더듬한 막걸리 집에서 형수님한테 예정에 없던 회초리를 또 주어 맞았다. “이봐 백기완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사내들은 술을 마신다, 아니면 빠른 배를 한번 씨원하게 타보겠다 그러지? 하지만 우리 아낙네들은 거기서 다르다는 걸 알아야 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우리 아낙네들은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 알겠어. 사내놈들 더욱 분발해야 할 거야.”
1975년 여름 장준하 선생님이 등산길에서 참혹한 암살을 당하고 나서다. 나는 너무나 원통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깊어지면 꼬박껏 형수님한테 전화로 노래를 들려드리곤 했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 놓아 우는데/ 님 잃은 그 사람도 한숨을 지으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부르고 또 부르곤 했지만, 실지로는 우리 장준하 선생님을 무자비하게 암살한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운동에 온몸과 온몸의 분노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형수님께서 “이봐 백기완이, 박정희가 우리 남편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백기완이 입으로 내 귀에 대고 말을 했잖아. 그렇다고 하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해야지, 맨날 노래만 부르면 어떻게 해” 그러신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자그마치 여섯 달 동안 밤만 되면 부르곤 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딱하고 끊었다.
아, 우리 김희숙 형수님, 그 분은 참말로 어떤 분이셨을까. 아마도 지난 60년대 중반쯤일 게다. 형수님께서 날 좀 보자고 해 갔더니, 내 눈으로는 처음 보는 땅문서를 내놓으면서, 이걸 장준하 형님이 알고는 대뜸 없애라고 하신다며, 하라는 대로 하긴 하겠지만 만약에 이것마저 없애면 아마도 우리집은 쌀 한 되 없는 ‘깡빌뱅이’가 될 것이니 형님한테 그러질 말라고, 말 좀 해달라고 한다. 이때 나는 배시짝 마른 침을 한 두어 번 삼키고선 “안 됩니다, 우리 형님은 독립군이 아니었습니까. 독립군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를 타도해야지, 그까짓 땅문서나 가지면 되겠어요. 그러니 형수님이 물러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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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왼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의 김희숙 여사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들 호권(가운데)·호성(오른쪽)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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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다. 장 선생님이 암살당하신 날, 저 포천 산골에서 주검의 머리는 내가 들고, 허리는 첫째아들(호권), 다리는 둘째아들(호성)이 들고 내려와 상봉동 사글세 이십만 원짜리 셋집에 뉘우는데, 머릴 받쳐 들었던 내 손에 섬짓 피가 흐른다. 놀라 살펴보니 왼쪽 귀밑에 날카로운 도끼질에서 나오는 피다. 그런데 높은 바윗돌에서 떨어지셨다면 바위에 스친 자국, 어려운 말로 찰과상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게 없는 거라. 나는 함석헌·문익환·계훈제 선생한테 “장준하 형님은 박정희의 직접적 암살이라”고 귀띔을 하고는, 이제부터 우리의 싸움은 그 암살의 실상을 폭로하고 나아가 박정희 유신독재의 결정적 타도를 위해 힘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문 목사가 앞장 선 이른바 3·1 구국선언이 성사되도록 도왔다.
이야기 하나만 더 붙이고 싶다. 장준하 선생님의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데 합의하고, 형님댁 뒤주를 열어보니 쌀이 한오큼도 없는 거라. 너무나 놀라 형수님, 쌀 뒤주가 왜 이렇지요, 했더니 그걸 이제야 알아? 그런다.
아, 뒤주에 쌀 한오큼도 아니 남기시고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운동을 하시다가 암살된 장준하 형님, 그런 형님과 사시다 가신 우리 김희숙 형수님, 위대하진 못해도 더없이 거룩하신 건 틀림없지 않을까.
형수님, 이 못난 기완이는 상기도 이렇게 어설프게 뉘우치고만 있습니다, 형수님.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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