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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복원된 신계사 대웅전. 효봉 선사가 출가했고, 죽음을 건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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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자리 ⑨]
반야 최고봉 ‘금강’ 에 살어리랏다
금강산의 자비로운 관음봉 아래 부처 이름을 딴 세존봉을 바라보는 터전에 목조 건물 한 채가 외로이 서 있다. 근대의 고승 효봉 선사(1888~1966)가 출가한 사찰이다. 효봉은 송광사를 일군 구산 선사와 법정 스님, 환속한 박완일 전 동국대 교수, 고은 시인 등의 스승이다.
신라 법흥왕 6년(519) 보운 스님이 창건한 신계사는 해방 전까지 거대한 사찰이었으나 6·25 때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됐다. 조계종 총무원이 북쪽과 협의해 지난해 11월 대웅전만을 복원했고 2007년까지 복원을 마칠 계획으로 공사 중이다.
1925년 이곳에 한 엿장수가 찾아왔다. 그는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선사에게 막무가내로 머리를 깎아달라고 청했다. 그는 평안도 양덕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로 일제의 판사가 된 이찬형이었다. 판사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며 1남2녀의 자식까지 둔 그였다. 식민지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한 몸의 행복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조선 동포란 동포들이 한마음으로 동참했지만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동참자가 아니라 동포의 심판자였다. 일제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단죄를 조선인인 그에게 맡겼다. 고등법원격인 평양복심법원에서 그는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동포를 죽이는 짓을 하고 말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같은 인간임에도 그는 자신만의 살 길을 좇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독립투사의 그런 의연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의 시작이었다.
조선인 첫 일제 판사로
3·1 만세 사형선고 ‘멍에’
양심의 고뇌끝 늦깎이 출가
내면의 불 태우고 또 태워
“중벼슬은 닭벼슬만 못한다”
직위·명예 허상 꿰?W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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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2년의 용맹정진에도 깨달음이 없자 결단을 내렸다. 깨닫기 전엔 절대로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며 신계사 건너편 기슭 법기암의 조그만 토담집에 들어갔다. 방엔 용변을 볼 수 있는 구멍 하나와 하루에 한번씩 밥을 넣어줄 창구멍 하나만을 내고 봉쇄해버렸다.
겨울 산의 강추위마저 범접하지 못한 삼매에 드는 처절한 수행을 한 지 1년 반. 그가 드디어 장발에 씻지 않은 귀신 같은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 순간 그가 찬 것은 생사의 문이고, 허상과 실상의 문이었다.
그 뒤 효봉은 송광사와 해인사의 방장으로, 또는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으로서 선지를 드날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한 것”이라며 직위와 명예의 허상을 직시했다.
또한 효봉의 면모가 드러난 것은 스승에 대한 태도에서였다. 석두 선사는 늘그막에 파계를 해 자식을 낳았다. 대처승들을 절에서 몰아내는 정화를 이끄는 조계종의 지도자인 그에게 은사의 파계는 당혹스런 일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스승을 바꾸는 승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효봉은 손가락질을 당한 스승을 통영 미래사에서 열반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출가 뒤 통영에서 3년2개월간 효봉을 직접 시봉하다 환속했던 박완일 교수는 말했다.
“큰스님이 판사 생활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해 한 말씀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일체를 꿈으로 생각하신 분이다. 그런 분에게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석가모니는 왕좌조차 버리지 않았는가.”
그는 큰 집을 위해 직위와 명예와 평판을 과감히 흘려보냈다. ‘금강’이란 불교에서 최고의 반야(지혜)다. 무엇이 금강 반야이던가. 금강산은 맑디맑은 신계천의 물도, 세존봉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조차 붙잡지 않은 채 담담히 서 있다.
금강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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