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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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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살때 “하나님 죄 씻을 시간 주소서”
해방·한국전쟁 곤궁 속 빈민에 사랑 실천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⑤ 강순명 목사 /
한국전쟁의 와중 전라도 광주에서 강순명(1898~1959·왼쪽 사진) 목사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구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 첫 집에선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왔던 사내가 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 버렸다. 두번째 집도, 세번째 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힘들게 끌며 골목을 다 다녀도 보리쌀 한줌도 얻지 못한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본 강 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하루하루 죽으로 연명하며, 방 두 칸에 대식구가 겨우 살아가는 비좁은 집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광주천 다리 밑을 지나다가도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죽어가던 할머니를 두고 돌아설 수 없던 강 목사는 또다른 할머니를 업고 와 집 안방에 누였다. 그렇게 집에 데려온 사람이 무려 30여명. 강 목사가 전쟁 중 데려온 걸인 할머니 때문에 강 목사 가족들은 방안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어 한뎃잠을 자야 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천혜경로원의 시작이었다. 1952년 7월이었다.
광주시 동구 학동 천혜경로원에 들어가 70여명의 할머니들을 보니 자식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어 양로원에 들어와 살아가는 노인들은 불쌍하다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정갈한 외모에 밝은 미소들이 경로원 전체를 빛으로 감싸는 듯하다. ‘오늘이 바로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여기고 여한이 남지 않게 모시려 한다’는 강은수(65) 원장은 강 목사의 아들이다.
강순명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으나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세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청년기를 방황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광주의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치던 ‘박치기 명수’였다. 형 태성의 눈물 어린 호소로 순명은 마침내 교회를 나가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소를 차려 새 출발을 했다. ‘돌아온 탕아’였다. 그는 그해 수피아여고를 나온 재원 최숙이와 결혼했다. ‘광주의 대부’ 오방 최흥종 목사의 장녀였다. 대인은 대인의 싹을 알아본 것일까.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의사의 청혼을 거절하고, 부모도 없이 뒷골목이나 누비던 이발사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기가 막혀 했지만 최흥종 목사는 보물을 얻은 듯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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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강순명목사의 뜻을 이어 ‘오늘이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모시고 싶다’는 강은수 원장이 천혜양로원 할머니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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