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성경이해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비합리성을 이해하면서도 성경을 계시의 책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의거해 믿음과 이성의 조화에 따라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가지는 계시와 영감의 영역이 진리 체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초월적 계시성을 벗어난 김교수의 성경 이해 및 해석은 기독교가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의 해석학적 도전에는 기독교가 무조건 무시해 버리거나 간과해 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들어있다. 성경에는 이 세계를 이끌 보편적 진리의 틀이 있다는 그의 강한 신앙적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은 보편적 우주의 신과 그 신의 뜻이 계시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을 경전으로 삼은 종교들은 그 진리의 보편성을 특수화하고 독점화하여 자신들의 신앙 체계 안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유대교 안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시 2천년의 역사 속에서 그 과오를 되풀이해왔다. 초기에 로마의 국교화의 과정에서,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근대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그리고 현대의 교회성장주의에서 기독교는 인류 사회를 이끌어갈 보편적 진리의 틀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진리의 보편성을 독점화된 교리 체계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는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메시지를 상실한 채 자신들만의 천국복음을 만들어 이 세계를 기독교의 틀 속에 묶어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세계를 구원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너무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안에는 묵은 포도주만이 잔뜩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화된 기독교가 형식주의와 물량주의와 도그마주의의 옷을 입고 중세의 유령처럼 앉아 있다. 세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진리의 길로 나선 구도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높은 교리적 담을 세우고 이 땅을 호령하는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낡은 부대에 담긴 묵은 포도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신선한 진리의 기별을 제공하기는커녕 스스로 곧 찢어지고 터져버릴 것 같은 낡은 체계를 애써 부여잡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기독교가 새 술을 담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눅 5:38)지 않는가?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는 어떤 면에서는 새 술과도 같은 것이다. 그의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해석학적 전제는 분명 21세기 기독교의 새 술이 될 수 있다. 그는 성서로 돌아가는 것만이 기독교를 우리 사회에 올바로 인식시키는 길이 될 것이며, 그렇게 해야 만이 현재 기독교가 직면한 부정적 인식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말은 기독교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세계를 구원할 진리의 보편적인 틀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교회 확장보다는 새로운 이론적인 틀을 구축해야만 하는 때라는 그의 항변은 너무 옳은 지적이다. 21세기 기독교가 인류의 희망을 책임질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새 부대로 거듭나야 한다.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이론적인 틀을 구축함으로써 기존의 낡은 부대 대신에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새 부대에 새 술, 즉 새로운 진리,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인 진리를 담아야 한다. 그 진리를 통해서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그런 새 술을 담아야 한다. 만일에 오늘의 기독교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로 거듭나기를 추구했더라면 김용옥 교수의 강의는 한국 기독교에 오히려 약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도전이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새 술과 새 부대를 예비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김교수 자신이 직접 기독교를 위해 새 술을 완벽하게 빚어내지는 못할지라도, 교회는 그와 더불어 새 술을 빚는 역사적 과정에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새 부대에 어울리는 새 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기독교는 새 부대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그래서 아직은 새 술을 빚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반대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금의 사태를 돌아보자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의 질책이 새삼 떠오른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9). 정녕 한국 기독교는 묵은 포도주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지 않은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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