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인격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삶과의 교섭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시공 속에 있는 나, 실존인간과 관계없는 시공 밖의 절대적 존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에게 무슨 존재론적 구속력을 갖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오로지 인간에게 ‘말씀’을 전하는 존재일 뿐이며 그 말씀은 인간에게 이해되는 말씀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계 속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이다.”(98페이지). 여기에서 말씀하신 실존을 넘어선 초월적 절대적 존재의 무의미성에 대한 논지와 관련해서는 문맥 해석에 따라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객관적 실재가 있다 할지라도 그 존재가 인간의 실존과 관련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란 존재는 실존에 내재하는 존재이며, 그 실존(세계와 시간)을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후자의 내재적 신 이해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선생님께서는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시공 밖의 절대적 타자(the Absolute Other)이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나라는 인간 실존에 내재하는 신적인 존재성의 자각”으로써만 가능하다(147페이지)고 했으며, “우리 자신 내에 숨겨진 신성을 파악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303페이지). 이러한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선생님께서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절대적 타자인 신을 언급하면서도 그 신이해와 신인식은 철저히 내재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 타자에 대한 선생님의 인식은 실재론적 신 인식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재론(realism)은 토마스주의(Thomism)에서 그 이론적 체계를 보여주었듯이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존재하는 실재(reality)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알 수 있다는 이론에서 출발합니다. 이에 따르면 전적 타자이신 신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실재하시는 존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실존을 벗어난 신 존재의 무의미성을 강조하면서 신의 실존적 내재적 존재성을 역설하시는 것은 기독교적 존재론의 범주에서라기보다는 실존주의적 존재론의 범주에서의 이해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선생님은 ‘인격신’을 믿는다고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신은 인간의 실존성 속에 인격적으로 내재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격신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일한 이해가 예수에 대한 선생님의 고백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를 믿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답하시면서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심상이란 표현은 일반 기독교인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과는 차별화된 선생님의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시기 위한 적절한 언어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탄생과 성장과 죽음과 부활과 같은 예수의 역사성을 포함해 케리그마로서의 예수를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라는 한 역사적 인물이 로고스 기독론적 존재로 받아들여지면서,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그 로고스를 자신 안에 실존적으로 내재화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선생님이 믿는 예수 역시 기독교가 선포한 케리그마로서의 예수가 아닌 보편적 세계 종교의 범주에서 예수의 말씀, 즉 로고스를 믿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도 실재론적이기 보다는 실존론적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선생님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이해는 다음의 불트만의 이해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때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한 편을 다른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말이 어떻게 가능한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에 대한 말로써만 대답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Glauber und Verstehen, 1933, 33).이런 실존적 견해와 더불어 불트만은 하나님은 “인간 이성의 삶에 그 기초를 놓아주는 로고스 안에” 실재한다(Ebd., 18)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트만은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므로 인간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간의 언급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을 통해서만 언급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인식은 스스로 계시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데, 그 하나님의 계시가 가시화된 로고스를 통해서만 그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로고스는 예수 안에서 실존화되었고, 그처럼 인간의 이성안에서도 실존화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 존재는 인간의 실존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불트만의 견해이고 이는 선생님의 존재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실재론적 이해 신앙고백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성과 관련해서 기독교 신학은 내재성과 초월성의 긴장이 늘 유지되어져 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신학에 들어서서 이 두 견해의 신학적 긴장은 변증법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20세기 신학>에서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기독교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성경의 이중적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하기를 추구해 왔다”고 말함으로써 현대신학사에 나타난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긴장을 표현하면서, 이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창조적 긴장과 균형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도전”이 현대신학에 주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내재적 존재론은 이런 신학적 탐구의 과정 중 일부로서 현대신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 이래로 이 내재성의 신학은 현대 기독교 신학 사조의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정신학자들, 세속신학자들, 해방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통해서 내재성의 신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학을 통해서는 인격신이 강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의 또 다른 한 축에서는 초월성의 신학과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가 항상 강조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실 20세기의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내재성을 강조하자 이에 대한 강력한 신학적 반발로 추월성의 신학을 강력하게 부흥시킨 것이었습니다. 칼 바르트를 필두로 해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신학자들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저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초월적 계시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기독교 실재론에 대한 신학철학적 입장을 다시 한 번 정립해 주었습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들어서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불가능한 사실성이 또다시 해체되고 있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체주의적 도전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 신학은 초월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현대 사상에 걸맞는 대화를 창출해냄으로써 그 도전에 응전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재주의는 초월적 이해에 대한 부정성으로 인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재주의 역시 인류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시켜주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돌프 하르낙을 위시해 대다수의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히틀러의 전쟁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느끼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신정통주의 신학을 창출한 칼 바르트의 경험이 바로 그 역사적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내재주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대안으로 초월주의가 다시 강조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으로도 역시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소망을 오히려 우리에게 오셔서 초월적으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 새로운 소망과 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류에게 소망이 되는 하나님은 단지 내재적인 인격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실재가 지향하는 초월적 목표점(telos)으로부터 우리의 현대 상황으로 침입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그렌츠, 501).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여전히 기독교적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실재론적 이해인 것입니다. 여기서 실재론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실재론과 20세기의 실재론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신학적 실재론의 한 대표인 윌리암 제임스는 현대적 실재론에 입각해 하나님을 하나의 초자연적인 존재로 소개하기 보다는 유한하고 진화하는 하나님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은 실재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현대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한 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실재론적 이해는 기독교가 견지해 온 전통적인 유신론적 실재론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실재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실재론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무시간적이고 완전한 존재로서 실존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실재론은 하나님을 초월하신 객관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재적 인격적 존재론의 철학적 중심은 임마누엘 칸트와 헤겔의 이성주의적 관념론과 계몽주의적 사유로부터 발전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사상들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진 내재성의 가치를 강조하고, 그 내재적 능력이 결국 인류 사회를 구원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인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19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의 이상이었고, 여전히 현대 사회의 한 이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결국 인류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 이해는 결국 계몽주의의 실패에 대한 사회학적 진단으로 와해되었음을 선생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의해서 제기된 계몽변증법, 부정변증법은 계몽주의 이상의 실패를 알려주었습니다. 신학에서 계몽주의의 실패는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내재성의 신학도 온전히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인류가 과연 이 사회의 진보와 발전, 궁극적 이상향을 향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는가?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희망의 주체로 보여지지 않는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그 인간의 내재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류는 어디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가 하나님을 단지 인격신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절대 타자이면서 이 세상을 향한 초월적 의지를 가지고 계신 존재 자체로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류 희망에 대한 영속적인 비전을 그로부터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 형이상학의 목적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로부터 알빈 플란팅카와 같은 현대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실재론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해는 단지 실존주의적 사유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사유가 어느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독자들은 그 사유의 문맥들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으며, 단지 한정된 지면과 시간 속에 드러난 텍스트들만으로 선생님의 사유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인격신과 예수의 심성에 대한 선생님의 고백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서 이 논지를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실재론적 측면에서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고백은 실존적 차원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가 이해하는 기독교 신학적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도올 선생님과 대중들에게 기독교 신학적인 설명을 드리며, 이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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