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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등대원에서 이성용 원장이 아이들과 공을 차고 있다. 이제 원생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사업 실패와 이혼 등으로 부모와 함께 살기 어려운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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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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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품 팔아 고아들 돌봐 이준묵은 곧바로 해남기독교청년회(YMCA)와 삼애농민학원을 설립해 땅 끝 해남을 ‘희망의 땅’으로 만들어갔다. 그에게 ‘하나님과 이웃과 농촌’은 하나였다. 세 가지를 사랑하는 ‘삼애’는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는 ‘광주의 성자’ 강순명 목사의 독신전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 이현필이 고아들을 계속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1953년 등대원을 설립해 날품을 팔아 고아들을 대신 보살폈다. 그리고 선명회의 후원을 받아 낙후지역 개발을 이끌고, 삼애농민연수원 등에서 영농기술을 보급했다. 그는 해남유치원부터 시작해 해남고등공민학교, 호만고등기술학교, 해남수성경로대학, 천진어린이집, 해남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을 설립하거나 운영했다. 그는 ‘목사’만이 아니었다. 종교를 넘어선 해남 지역 공동체의 등대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해남까지 왔으면 대흥사는 꼭 들러봐야 한다”며 대흥사로 안내하곤 했다. 성용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민학교 때 대흥사에서 1주일간 참선을 하기도 했다. 이준묵은 그러면서도 신자가 서넛에 불과한 마을도 놓치지 않고 돌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남에서 하나의 교회는 무려 50여개의 교회로 불어났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두운 새벽 뒷산에 올라가 수도승처럼 기도했던 이준묵은 날이 밝으면 수도자에서 농촌의 혁명가로 변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많은 일을 한 이준묵의 말과 태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인사치레의 빈말을 하지 않았고,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쌀쌀맞다거나 독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람들은 이준묵이 자기 자식에게조차 예외가 없이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본 뒤에야 그의 본모습을 이해하곤 했다. 학교 설립·농촌 부흥 앞장 이준묵의 유일한 형으로 그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던 이문환은 호남비료공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한 당대 제일의 사업가였다. 그런데도 이준묵은 늘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다녔고, 남들이 버린 국민복을 기워서 입었다. 머리도 늘 집에서 스포츠머리로 깎고 살았다. 그는 늘 가난했지만 해남은 갈수록 활기를 띠었다. 덴마크엔 농촌부흥을 이끈 그룬투비가 있었고, 한국엔 이준묵이 있었다. 해남/글·사진 조연현 종교젼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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