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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 학생들의 민족혼을 일깨웠던 옛 양정고 건물을 양정고 총동창회 인승일 사무처장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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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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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에 사명감 불어넣어
강제징집 노무자 돌보다 병사
당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쓴 미국 선교사 윌리엄 그리피스를 비롯한 서양선교사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으로 서구에 소개했고, 일제와 친일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와 민족이 한심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김교신은 ‘무레사네’(물에 산에)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주일마다 서울 근교의 고적과 명소를 심방하고 참배하면서 청년들에게 우리 국토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탁월성을 발견하게 했다. 역사와 지리 선생인 그는 한반도를 “물러나 은둔하기는 불안한 곳이지만, 나아가 활약하기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며 움츠린 청년들의 어깨를 활짝 펴게 했다. 김교신은 청년들에게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몇 천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라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약이 아니라 이 땅의 ‘구약’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접목하려 했다. 그는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성취를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복적인 서구의 기독교적 모습을 비판했고, 미국 기독교를 모방해 격정적이고 반지성적인 풍조에 빠져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이성적 신앙을 갖게 했다. 그는 ‘미국이나 일본의 기독교’가 아니라 은근하고 담박한 조선인의 심성과 동양 정신의 진수라는 그릇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담은 ‘조선의 기독교’를 열고자 했다. 전원생활을 즐겼던 김교신은 북한산 산골 정릉에서 살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찬물 마사지를 하고서 소나무 숲 속에 들어가 기도한 뒤 텃밭을 가꾸었고, 늘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다녔다. 8남매 아버지이기도 했던 김교신은 폐간과 감옥행을 전전하면서 불굴의 의지로 혼자서 시간과 비용을 모두 들여가며 <성서조선>을 만들었다. 1년의 옥살이를 끝내고 43년 출옥한 김교신은 조선노무자 5천명이 강제 징집 당해 일하던 흥남 일본질소비료에 몸소 들어가 유치원, 학교, 병원 등을 세우고, 궤짝 같은 집에서 살며 떨고 지내는 노동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45년 4월 발진티푸스가 만연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병에 걸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다 감염돼 목숨을 잃었다. 그가 <성서조선>을 통해 어두운 밤하늘에 대고 수십 년 간 닭울음소리로 알렸던 해방의 첫새벽을 100여일 앞둔 때였다. 그의 나이는 불과 45살이었다. 공원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우승으로 타온 것을 김교신이 심은 월계수가 그가 사랑한 조국과 하나님을 이어주듯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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