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익두 목사(1874~1950)
|
(20) 김익두 목사 서울 인사동 초입에는 100년이 넘은 교회 건물이 있다. 승동교회다. 3·1만세 운동 때 학생 대표들이 모여 거사를 숙의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김익두 목사(1874~1950)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못 이겨 그만둔 1938년까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훨씬 전인 1920년에도 그는 승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이끌었는데 그때 무려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이 때 김 목사는 무려 2주일 간 금식하며 부흥회를 이끌었다. 예배당에 모두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멍석까지 깔고 앉은 참석자들은 그가 토해내는 열변 속에 함께 나뒹굴며 시대의 어둠을 뚫을 빛을 보았다. 과거낙방·빚보증으로 미치광이처럼 살다
부흥회 접한 뒤 참회 ‘깡패’서 전도사로
설교 감화해 교회 150곳·목사 2백명 탄생 승동교회 담임 박상훈(53)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체험하고, 김 목사가 있는 현장에선 엄청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고 말했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탄탄대로의 소년을 단련시키려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했던 과거시험에 그만 낙방해 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익두의 낙방에 충격을 받은 부친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인생의 문제를 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산했다. 설사가상으로 친구의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까지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익두는 술과 기생에 빠져 타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장꾼들은 장에 가는 길에 성황당에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은 제발 김익두를 안 만나게 해 달라”고 빌 정도였다. 그런 익두가 어느 날 장터에 나갔다가 서양 전도사가 주는 전도지를 받았다. 집에 돌아가 구겨진 종이를 펴보니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을 본 순간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 친구가 스왈렌 선교사가 이끄는 부흥회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예전 같으면 콧방귀를 뀌었을 그는 친구를 따라나섰고, 비로소 예수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랜 습관에 물들어 있던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술친구와 어울려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며칠 뒤 그런 삶으로 빠져들어선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든 그는 술을 마시던 기생집을 박차고 나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산속에서 가슴을 치며 밤을 꼬박 새면서 참회했다. 그리고 새벽에 돌아와 잠을 자던 중 비몽사몽 간에 큰 불덩이가 가슴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어이쿠, 불벼락이야!”라고 놀라 소리쳤다. 안방에서 자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 뛰어올 정도였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익두에게 빠져나간 것은 남을 해치는 폭력심이었고, 그에게 들어온 것은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는 교회에 나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었다. 그 뒤 이번엔 깡패가 아니라 전도사로 장터로 나갔다. 그가 찬송을 부르자 과거에 그에게 수없이 맞은 원한을 가진 상인들이 그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 와서 때려도 오히려 “나를 실컷 때려 달라”며 눈물로 회개했다.
|
김익두 목사가 머물던 승동교회에서 박상훈 목사가 김 목사를 기리고 있다.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