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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추모재’ 마친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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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추모재’ 마친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
굵은 빗줄기가 가늘어지던 29일 낮 강원 양양군 낙산사. 49재를 겸해 모신 ‘숭례문(문화유산) 추모재’를 마친 정념스님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쩌렁쩌렁 목소리와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기만 한 모습은 언제 그랬냐 싶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님은 무자년 음력 첫날부터 새벽 3시간 이상 매일 작정기도를 하던 중 나흘째 되던 날 남대문 화재사건이 터졌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평소 오는 기자 막지 않은 그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친 기자들은 혹 낙산사 복구에 정부 책임을 캐내기 위해 기자들은 눈에 불을 켰다. 남대문 화재 당시 외유중이어서 물의를 빚은 유홍준 청장의 문화재청의 문제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사흘 밤낮 취재에 응하랴 기도 이어가랴, 스님은 기상하던 중 쓰러져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을 거쳐 며칠간 병원신세를 졌다. 문화유산추모재를 방금 마친 스님과 낙산사 서편 일주문 앞 홍예문 바로 아래 선열당 공양 자리에 마주했다. 선열당은 화재 후 현고 스님이 총책임을 맡고 진행하는 재건 공사때 새로 지어졌다. 공양 상엔 김치와 양념 안한 구운 김, 절인 고추와 깻잎, 두부, 콩나물 무침 등 반찬 예닐곱 가지와 김치국*에 오곡밥이 올랐다. 팥 고물이 든 떡과 귤, 배, 키위가 담긴 과일접시도 놓였다.
“남대문 화재는 공동의 업입니다.” “낙산사나 숭례문의 일들도 어찌 보면 다 인연입니다. 별개가 아닌 것이지요. 문화재는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공동의 책임이지요. 오늘은 다른 것보다도 참회의 시간을 가진 겁니다. 몇 천 년을 이어온 조상들의 서러웠던 한을 털어버리고 감복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작은 돌, 나무 하나에까지 정성을 기울일 수 있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아이를 키우듯이 보살펴야지요.” 스님은 법회 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낙산사와 숭례문 화재는 다르지 않아요. 같은 인연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환생하는 거 모습을 바꾸는 겁니다. 저 남대문이 죽었다 생각하지 말고 그 혼과 정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어야 한다는 얘기죠. 건물이 탔다고 없어졌다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가 되는 것은 뭉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런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돌이든 나무이든 작은 것 하나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이런 걸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한 가정에 하나씩 나무든 돌이든 문화재든 정해서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드리는 것, 직접 가꾸고 보살피는 것, 이리 되면 남대문을 지키는 사람? ?수천 명이 될 것이고 이들 스스로가 당국에 부족한 점들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스님은 3년 전 밑동까지 타, 새로 이식한 공양간 밖 소나무들을 가리키며 “신도님들이 저 나무 한 그루씩 보살펴주시도록 할당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남대문 복원은 (낙산사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이 원망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것이 공동의 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함께 공유하고 같이 정성을 쏟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봐요. 더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거지요. 600년의 역사를 1, 2년 빨리 해서 좋을 이유가 없어요. 다시는 미숙함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토론과 정성으로 해야지 이제 빨리 짓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정말 사람의 향기가 나는 선진국이 돼야죠.” 낙산사는 화재 후 입장료를 안받고 있다. 절 안의 먹거리도 모두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세끼 식사와 점심때 국수 공양, 자판기 커피 모두 공짜다. “무료 커피를 갖고 스님 중 일부가 문제를 제기했어요. 수학여행 학생들이 무더기로 와서 공짜로 마시는 게 교육상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거죠. 내가 그랬어요. 그런 아이들이 200원 300원 짜리 커피 한자 무료로 마시며 낙산사와 좋은 인연을 맺고 간다, 조그만 인연 하나로 평생을 낙산사 자랑을 하고 살거다 그랬지요.” 대운하 필요·불필요 떠나 국민이 원치 않으면 안해야
절도 이젠 이웃에 다가갈때 올 공부방·청소년센터 지을 것
난 자취없는 스님이고 싶어 낙산사 복원 뒤 훌훌 떠났으면 스님은 20, 21일 전국의 낙산사 신도 7백명을 모시고 금산사, 선운사, 화엄사, 쌍계사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길에 김해 봉하마을에 들러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와 30여분 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고 했다. 인터뷰 화제가 정치얘기로 자연스레 바뀌어가고 있었다. “국가와 정부는 항상 국민을 어떻게 받들 것이냐를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오만하고 횡포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빵을 줄 테니 와라 하는 식은 안 되는 것이지요. 빵을 주더라도 질 좋은 희망을 함께 주어야 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참여정부가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투명해지고 완장 찬 사람들이 많이 얌전해졌던 것은 사실이지요.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는 “그런데 한달 만에 경찰 백골단 얘기가 다시 나오고 권력기관이 옛날로 회귀하는 듯 악령이 살아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엠비(스님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엠비라고 하거나 ‘이명박 대통령’ 이라며 ‘대통령’이라고 호칭했다)를 찍었든 안 찍었든 좋고 나쁘고, 좋고 싫고가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국민들도 엠비가 옳은 일을 하면 밀어줘야 합니다. 반대와 찬성에만 몰입하는 사회는 안 됩니다. 원인규명도 없이 편가르기만 하는 사회는 더 이상 안 돼요.” 스님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제 정말 종교 얘기가 안 나오길 바랍니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종교이야기가 좀 안 나왔으면, 종교에 대한 집착을 벗어났으면 합니다. 이대통령께 정말 발원합니다. 종교를 믿을 때도 안 믿는 듯 믿고 안 다니는 듯 다니며 국민을 섬기고 통합하는 대통령이 되어주시길 말입니다.” 그는 “피땀 흘려 이룬 민주화가 다시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 국민의 맘이 따뜻하고 향기가 나는 정부를 만들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스님 말문이 터진 듯하다. “요즘은 교육을 통해 조선시대의 신분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평등권이 침해되고 서열이 매겨지고 가난이 대물림되고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고...교육이란, 예를 들어 60점 이하 아이들을 60점까지 만들어주고 그 이상이 되면 영어를 하든 뭘 하든 자신이 하고 싶을 것을 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공양보살이 가져다준 **차를 마신 후 공양간을 나와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홍예문 앞 다실로 옮기는 동안 스님은 선열당 아래 취숙당을 가리켰다. 스님과 신도들 숙소로 쓰이는 곳이다. “지붕이 기역자(ㄱ)자 두 개를 엮어놓은 모양입니다. 가운데 문을 열면 양쪽에 방이 배치돼 있어 아주 실용적이지요. 우리가 식사하고 나온 선열당 지붕도 서쪽은 짧게 동쪽은 길게 했어요. 바람을 막을 때 좋다고 해요. 석축에도 12지간을 형상화했어요. 정성과 머리를 써서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스님은 3년전 화재 당시를 떠올렸다. “주지로 부임한 지 보름되던 날이었지요. 산불이 잡혔다고 하지만 조짐이 이상해요. 그래서 군청 상황실로 가서 소화기 얻어다 놓고 인근 가게 문을 모두 닫게 했어요. 스님들한테도 절의 중요한 것들 대피시키고...잠시 뒤 오후 3시부터 불이 확 붙어왔지요.” 화재 당시 이야기는 다실로 옮겨서도 더 이어졌다. 그 가운데 몇 대목이다. “불난 다음날 주민들에게 5만원짜리 농협상품권을 160 가구에 나눠드렸어요, 라면이라도 사드시라고. 지금 이 기억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데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불이 나고 나니 ‘누구누구 물러가라 물러가라’ 현수막이 나붙었어요. 그래서 주민들한테 그랬어요. 물러나는 게 상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뭘 해달라 해달라 이래야 된다고요. 쫓아내기보단 책임을 지도록 가지 말라 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산림청장은 나무를 심어주고, 농림부는 벼를 심어주고, 이게 더 지혜로운 방식이죠. 누구 나가는 게 뭐가 도움이 됩니까. 여기는 정치판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아픔을 같이 나눌지를 이야기해야죠. 대립 없이 우리는 잘 해결했다고 생각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추석 때는 커피세트를 주민들에게 돌리고 합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다실로 옮긴 스님은 앉자마자 녹차를 손수 내놨다. 해남 대흥사 두륜산 녹아차였다. 첫잔을 따르던 스님이 불쑥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얘기를 꺼냈다. “작년 변양균씨 사건 났을 때 D일보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변 실장 아시느냐’고 해요. 그래서 안다고 했죠. 신문 하고 TV에 자주 나오는데 모른다면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잘 안다고 했죠. 그런데 단 한 번도 만나거나 전화한 적도 없어요. 입적하신 법장 총무원장 스님이 변 실장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라고 하셨는데 하지 않았지요.” 그는 일부에서 자신을 ‘정치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꽤나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잘 알기 때문에 몸조심 하고 말조심, 마음조심 안하면 누를 끼친다고 생각해 (대통령) 측근들 공식적인 자리도 피했다”고 했다. 그는 “스님들은 모자란 듯 살아야 한다”며 “어려워도 잘못 인연을 맺으면 시빗거리가 된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된 후 보름간 매일 1080배를 올렸어요. 대통령과 친하다고 소문 나면 별 사람들이 다 몰려오고, 그러면 좋았던 인연도 끊어지게 되거든요. 일부러 노 대통령과 거리를 두었지요. 대통령을 도운 사람들은 마음은 가깝게 하되 몸은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이명박 대통령 주변도 마찬가지지요.” 스님은 노 대통령과의 인연이 1993년 가을, 스님이 봉정암에 있을 때 시작됐다고 전했다. 권양숙 여사가 기도왔는데, 놓고 간 축원카드에 ‘노무현’으로 적혀 있어, 96년 국회의원선거 때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을 지원하기 위해 종로 관내 사찰을 일일이 돌며 지지를 부탁했다고 한다. “정의롭고, 옳은 것 위해서라면 비굴하지 않는 노무현 모습이 좋아서” 그랬다고 한다. 항간에는 스님이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시절이던 2002년 권 여사를 모시고 전국 사찰을 돌며 지지를 부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님 그 얘기 사실입니까?” “아녜요. 96년 국회의원 선거때 한번 도와드렸고 국회의원에 떨어지고 난 후 마음으로만 올바른 길 가시라고 그랬지 모시고 다닌 적은 없습니다. 대통령 된 이후에도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두어번 뵌 게 전부입니다.” 기자는 “그동안 낙산사 다녀가신 대통령들이 있는가”고 물었다. “노 대통령은 그랬을 것 같죠. 그런데 대통령 되기 전이나 후나 한번도 안 오셨지요. (지난 주 봉하마을서 만났을 때) 올해 기회가 되면 오시겠다고 하더군요. 이명박 대통령은 낙산사 화재 뒤 2006년 11월 위로차 들르셨지요. 이것저것 관심을 많이 보여주시더군요.” 스님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궁금해졌다. “2005년 9월 법장 총무원장께서 돌아가셨을 때 종로 조계사에 문상 와 나무그늘 아래서 30분 정도 말씀 나눴어요. 나쁜 인연들은 끊고 좋은 일을 많이 지으시라고 했지요. 재산도 사회에 기부해 뜻있게 쓰시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낙산사에 내려와 복원에 관심을 보여주었지요. 이후 전화 통화는 몇 차례 했지만 만나지는 않았어요. 작년 3월 세상에 잘 알려진 대로 손학규 지사가 낙산사에 다녀간 뒤에도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이명박 후보나 손학규 지사나 일체 안만났어요. 손 지사는 올 양력 정초에 해맞이 왔길래 잠깐 뵈었지요.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연을 맺고 하는 사람한테 아주 진지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기자가 이 대통령을 지금 만나면 해드릴 얘기나 혹시 편지라도 전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요. 마음으로 발원하면 되지요. 대통령께서는 지역, 학교, 종교는 물론이고 절대 편가르지 말고, 정말 집착하지 말고 가장 좋은 검증시스템을 통해 사람을 골라야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집착하면 당신만 불행한 게 아니라 국가가 불행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잘 해주길 바랍니다. 엠비께선 천천히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하루 이틀 늦는다고 국민이 원망하지 않습니다. 부작용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원망합니다. 여론 등 국민들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대운하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필요, 불필요를 떠나 국민이 동의할 때까지, 준비될 때까지 몇 년이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 경제 생태 그리고 국민 모두의 통합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합니다.” 다시 절간 얘기, 불교 얘기로 화제가 바뀌었다. 기자가 “스님이 정치력이 꽤 있으신 것 같다”고 하자 이런 대답이 되돌아왔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왔다가도, 가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고. 밖에 요양원 유치원도 짓고 올해는 공부방이랑 청소년센터를 세울 겁니다. 50억 공사죠. 낙산사에서 다 아껴갖고, 저희가 앞에서 청소하고 그래요. 양양군에서 노인들 점심에 한달 50만원 보조하는데, 절 돈은 천오백 들어요. 저는 꿈이 우리 지역아이들에게 실질적인 꿈을 주고 싶어요. 좋은 유치원 시설에서 강당만 60평 그런 유치원이 없죠. 아이들 연극도 하고 놀라고.” 그는 외부에 한 번도 돈 달라고 손 벌린 일이 없다고 한다. “원장스님들이 도와준다는 데도 제가 안 했어요 제가 기도를 하고 해서라도 제가 하겠다고. 어려워도 사람들이 십시일반해서 해야 열린 절이 되지 누가 큰 돈을 시주해서 지으면 절에 혼이 없습니다.” 낙산사엔 평일 2천명 주말엔 1만명 가량의 신도들이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에서 찾는다. 그들이 절을 찾는(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절을 찾아오게 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멀리서 나이 드신 분들이 오려면 버스를 몇번씩 갈아타야 합니다. 차비도 만만치 않아요. 낙산사에서 조계사에 홍보물을 내고 신도들을 모십니다. 전국에서 오시려면 왕복차비 가 10만원 가까이 듭니다. 그 돈을 절에 시주하고, 여기서 우리가 차를 단체로 빌려 보내드리고 식사도 제공하지요. 그러면 그분들은 의미 있게 돈을 쓰는 셈이죠. 적게 투자하고 제가 수익이라고 해서 죄송하지만 이렇게 해서 시주가 모이는 거죠. 그분들이 차비 대신에 우리를 도와주고 가는 겁니다. 비록 자신들이 돈내고 왔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게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냈기 때문에 뿌듯한 자부심도 갖게 되는 거예요.” ! 대단한 경영마인드다. 그는 “사찰부터 개혁해야 한다”며 이런 말을 했는데, 참 적절한 예다 싶었다. “아이들이 밤 10시까지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지요. 부모들이 맘 놓고 일할 수 있도록 말이죠. 교회는 하고 있는데 사찰은 아직 변하지 않고 있어요. 이웃이 없는데 절이 무슨 필요냐,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대웅전 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스님들이 나서서 지역의 청소년센터, 공부방부터 가서 봉사하고 해야 절이 삽니다. 절이 법당만 지어 놓고 사람이 안 오면 뭐합니까? 스님 혼자 지키나...”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의 추억이 작용한 듯하다. “충청도 금산 시골에서 자랄 때 어른들이 밟고 다니는 뚝방길은 겨우내 얼었다 봄이 되면 녹아서 무너져내려요. 그런데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 금방 견고해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안 사니 뚝방길이 다져지지 않아 여름 홍수에 다 휩쓸려 가요. 말로만 농촌을 살리자고 할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농촌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100대 기업, 정부투자 300개 기업에서 강원도나 시골의 마을회관이나 학교로 인턴을 보내 1년 기간을 이런 곳에 와서 공부방에서 마을회관, 폐교 촌에 도움을 주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농부들도 자식 도회지 안 보내도 영어 한문 가르칠 수 있으니 농촌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겁니다. 경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졸업하고 경위 달고 뭐 하는 것도 좋지만 국민들이 뭘! 원하는지를 인턴 1년이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애들을 가르치고 국민들 옆에서 있다 현장에 나가면 진정으로 국민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어차피 있는 인턴제도들을 제대로 활용하자는 얘기죠.” 정념 스님의 낙산사 아래 마을 그러니까 ‘사하촌’에 대한 애정은 구체적이고 남다른 듯하다. “어린이날엔 초등학교 애들한테 작은 선물을 해요. 촌이라 엄마는 항상 애들 돌보기보다 논밭에 일하러 가야하니 아이들은 늘 외롭죠. 동자승이 들어간 손목시계를 주었는데, 올해는 책을 좀 사주려구요. 또 공부방으로 열린도서관을 지을 겁니다. 엄마들이 밖에서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기다리며 책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도록 하려구요. 설계를 그렇게 다 마쳤습니다. 촌아이들한테 희망을 키워줘야 해요. 노인들도 점심 먹고 가고 좋아해요 집에 있으면 끄적끄적 그냥 살려고 먹는데, 여기 나오면 운동도 되고 친구도 있고 외로움도 나누고 300명 노인들이 재밌게 지내죠. 사실은 정부한테 아쉬운 게 있다면 복지도 너무 도시중심으로 진행돼요. 사실 농촌 복지가 중요해요. 뭐가 제대로 된 문화시설이 없으니까 자꾸 떠나고 더욱 황폐화가 됩니다. 교육시설이 초중고를 모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죠. 어디서 살 든 간에 차별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각자 위치에서 살 수 있죠.” 그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스스로 아픔을 도려내고 독선과 편견을 어떻게 줄일까 고민해야 미래지향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정념 스님은 타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연합해서 우리 종교인들이 함께 지역의 고민과 문제들을 의논하고 얘기해서 지역을 잘 아는 분들과 함께 사회운동을 하면 정부나 기업도 힘이 될 겁니다. 낙산사 복원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타 종교지도자들을 만나 불교에 국한하지 않고 함께 지역을 살려낼 수 있도록 머리를 짜낼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도 자기들끼리만 하려고 해요. 혼자만 하려고...그건 아니지요.” 그는 경북 의성 고운사의 호성 스님, 법주사 노현 스님, 선운사 법만 스님 등과 도반으로 두달에 한번쯤 만나 여러 고민들을 의논한다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절을 일반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할까, 그런 거죠. 사찰 재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고 구조적인 변화를 모색할까 그런 거 말입니다.” 기자가 물었다. 불교유신 같은 것이냐고? “그건 스스로 아픔을 도려내고 독선과 편견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 우리가 일하는 데 그게 가장 중요한 거고, 그걸 줄이면 그 조직이 가장 잘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요. 모든 이들에게 독선과 견을 줄이는 것만이 미래지향적인 조직이 될 수 있으니까요.” 기자: “스님 머릿 속에 늘상 머무는 생각이랄까 상념이 무엇이지요?” 스님: “지금은 내 코가 석자, 천년고찰이 제일 먼저죠. 복원불사 그것!그리고 두 번째는 지역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겁니다. 한 6대 4 정도 이 두 가지 생각을 늘 갖고 있죠. 젊은 사람들은 안 가르쳐 줘도 알아서 잘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노인들, 소외된 분들은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기자: “스승은 누가 계시죠?” 스님: “출가할 때 수계한 스님이 있고 오현 회주스님이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전해주셨지요. 큰 스승이십니다. 옛말에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장님 삼년 그런 말 있잖아요? 세상을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산 사람, 귀가 없어도 듣고 입이 없어도 말할 줄 알고 눈이 없어도 볼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진 분이 회주 스님 오현 스승스님이십니다. 기자: “법랍이 몇 년이시죠? 이런 건 여쭈는 게 아닌가요?” 스님: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 30년입니다.” 기자: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은?” 스님: “밀양 얼음골 상운암 토굴에서 혼자 지낼 때입니다. 전기도 안오는 곳에서 혼자 지낼 때 거기 주위에 독사가 많이 살았죠. 아침에 일어나 촛불사이로 보니 머리 맡에 살모사가 있어요. 나와 하룻밤을 함께 지낸 것이죠. 무슨 인연으로 이 살모사가 나에게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단순히 춥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랑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여기 들어와 나를 해치지 않는가. 살아있는 모든 것, 생명의 존엄성 그런 걸 생각했죠. 도랑의 뱀들을 죽였더라면 분명히 그 살모사가 나를 죽였을 것이다, 너와 나의 인연은 무엇인가? 저도 일에 치이다 보면 직원들에게 화를 내거나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상처 되는 말과 모습들보다는 서로 지혜롭게 아껴주는 말들이 필요합니다. 비판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쌓이는 것은 업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가 불교의 번뇌입니다. 이게 어디서 오느냐, 가슴에서부터 머릿끝까지 오는 거죠. 우리가 화가 났다 하는 게 바로 번뇌가 일어났다 이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살아가면서 마음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너 왜 화났어?’ 그러지 말고 ‘오늘도 중생이 번뇌가 일어났구나 관세음보살’ 이렇게 말하면서 같은 표현이라도 좋은 표현으로 기도의 표현으로 하면 좋지요. ‘왜 나한테 그래’가 아니라 ‘뭔지 서로 몰라도 그래 내가 그동안 너한테 잘 못했구나’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게 좋아요. 우리가 정부, 대통령을 비판할 때도 직설적인 것보다 지혜롭게 됐으면 좋겠스니다. ‘엠비는 다 그래’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느끼는 감정이 뭔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죠. 삿대질을 겸손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도 비판도 상처나지 않게 했으면 합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상처를 주고받는 말이 아니고 말입니다. 풀이든 나무든 뭐든 열이 받으면 안 자랍니다. 사람한테도 무시하고 열 받게 하면 잘 될 일이 없다 그말이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자: “왜 출가하셨나요?” 스님: “그게 지금 대답하기에는 부끄럽습니다. 처음 10년차쯤에는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머뭇거려지고 말을 못하겠어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내 마음속의 초발심이 퇴색은 안 되었나, 혹시 초발심이 있기는 했는가 하는가 두려움 말입니다. 답을 할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고 답이 없습니다. 그때 꿈들을 스스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부끄럽지요.” 기자는 몇가지 인연에 대해 질문을 계속했다. 1.신정아씨와 변양균 실장의 경우 “사람마다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이 있는데 변 실장 같은 경우는 악연이 아니었겠나, 좋은 인연이 얼마든지 될 수 있었는데 서로 속이고 이런 악연이 아니었겠나 그래요. 좋은 인연은 자기 양심을 속이지 않아야 해요.” 2. 황우석 교수의 경우 “그와는 인연은 없습니다. 원장스님 모시고 서울대 한 번 가본 적은 있습니다. 어려울 때 불자니까 격려차 한번 갔었죠. 불자니까 그 사람이 좋다 이런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걸 했을 때는 비판해야지 뭐든지 속이면 안됩니다. 의도적으로 속이기보다는 상황적으로 그렇게 오바했다고 봐요. 자기 허물을 드러내고 내가 이만큼 잘못했다고 진정성을 갖고 국민에게 참회를 하고 그랬어야죠. 잘잘못은 자기가 제일 잘 알아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가 거짓말인지, 진실들을 풀어놨으면 자신도 상처를 안 받았을 텐데 필요이상으로 허물을 감추려하다보니 진실도 함께 감춰진 것 아닌가 합니다.” 3. 금강산 안내원과의 인연 “2000년 금강산에 갔을 때죠. 금강문에서 안내원을 만났는데 북한 마라톤 국가대표 출신이래요. 해우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이가 자기 인생 가족이야기를 막 하더라고. 여성동무가 다 이야기를 하더니내가 스님인 줄도 알고 뒤에 따라오면서 먼저 못가게 하고, 언제 오시려고 하느냐고, 언제인지도 몰라도 언젠간 온다고 했어요. 돌아서는데 눈물을 글썽이더라고요. 두시간 밖에 안 만났는데... 옆의 기자가 그걸 쓰려고 해 내가 못하게 했지. 그 얘기 나오면 그 사람 다친다고. 이북이 안 변했다고들 하는데 저는 마음 속으로는 변화가 이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민간교류가 참 큰 기여를 했다 생각해요. 이제는 이북사람을 만나도 그렇게 큰 눈치 안 보고 대화하지 않습니까? 이쯤 해 기자한테 한가지 궁금증이 다시 떠올라 주저없이 던졌다. “어떤 스님으로 남고 싶습니까?” 내뱉고는 ‘우문’이라고 곧 후회했는데, 뜻밖에 ‘현답’이 금세 되돌아왔다. “사람들 마음 속이나 기억 속에 아무 자취도 없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스님이고 싶습니다. 내가 낙산사를 복원을 했다, 어떤 스님이었다가 아니라 공수래공수거라고, 낙산사 1000년 고찰이 모두 복원 되면 모든 걸 내려좋고 떠나기를 발원합니다. 그래서 60살쯤 돼서 여력이 있다면 촌이나 동네에서, 아이들에게 한문 가르치고 죽은 이들 염불도 해드리고 어른들한테 유식한 이야기도 해주고 그런 거 하고 싶습니다. 지금 주지라는 이름의 굴레, 정념이라는 굴레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자유자재로 바람처럼 어디서 불어오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이름도 자취와 흔적도 없는 삶, 형식의 굴레가 없는 게 꿈입니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것’이 우리 삶이듯이 (집)착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스님은 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 꿈은? “글쎄 어떤 정해진 꿈이라기보다 희망이라 할 수 있죠. 괴로움 절망 속에서도 합해져서 희망의 마음을 갖도록 말이죠. 여기 오는 누구나 나쁜 마음 번뇌를 지우고 꿈을 가지도록 말입니다. 꿈만큼 좋은 게 없잖아요.” 스님은 자신의 꿈 역시 반복해 강조했다. “내 굴레로부터 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르겠어요. 왜 내가 여기까지 주지를 하러왔는지.” 어느 새 인터뷰가 4시간 이상 이어졌다. 스님은 “고문입니다”라며 “ 오래 떠들었는데 쓸 말이 없겠습니다. 잡사만 얘기해서 본사가 없으니...본래 본사를 모르니 헛소리만 해댔네요” 했다. 녹아차를 내던 1.8리터짜리 생수가 텅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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