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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5 14:06 수정 : 2008.09.05 14:06

모든 승려는 땡중 혐의에 노출되는데 이유는 세상에 그럴듯한 짝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개인적 정진에 몰입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적행사에 너무 바쁜 삶을 살아왔다. 그의 종교적 배경이 되는 티벳 불교가 라마의 환생을 주장하는 등 미신에 상당히 연루된 형식 불교라는 점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는 국제사회에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진 강점을 갖고 있어 불교의 가르침과 이미지를 세계에 전파하는 순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어째서 한국에 오지 못하는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는 참으로 굴욕적이다. 기독교도인 MB는 달라이 방한을 허가함으로써 그와 관련한 국가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중국을 길들일 수 있을까?

전문수자(修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일반인에 비해 행색부터 다르다. 무채색의 복장(服裝) 칼라는 시각 상 다소 거부감을 주는바 진리 탐구를 방해하는 속된 정동(情動)을 금기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승려의 삭발은 그 비장한 풍모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를 연상케 하는데 그만큼 존재의 근저에 이르는 내적 투쟁이 물리적 전투에 못지않다는 실정을 암시한다. 속세의 환락과 편이를 포기하고 선택한 구도의 피안에 과연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숭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민주사회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적 전제로서 기능해온 게 사실이지만, 종교가 그 탈세간적 이미지와는 달리 시민의 일상실천 속에 꽤 깊숙하게 연루되어 있는 현실과 대조했을 때 자율에 방치된, 비대칭의 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 내부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감시하고 개선하는 책임이 조직 자체에 주어져 있어 윤리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나 할까. 근대적 사유는 생활세계 일반에 걸쳐서 낡은 관습과 미신을 말소하고 이성에 부합하는 일상성을 확보했지만 유독 종교 영역은 전근대의 전통적 신화 구조 뒤에 숨어서 비합리적 권위를 온존해왔다.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이미 종교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윤리가치의 검증을 신성의 이름으로 면제받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시민적 신앙에 연관되는 조직운영이나 포교양태, 시민사회에 내적으로 개입하는 다양한 층위에서 종교는 공권력에 의한 통제같은 외부 압력으로부터 거의 자유로운 입장에 위치해있다. 정교분리의 도그마적 해석에 위축된 탓인지 정부는 좀처럼 종교를 자극할 수 있는 법행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정치나 종교는 양쪽 다 민중에 기반한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상동적이다. 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지 않는 한 여간해서는 사이좋은 공생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서로 상대방의 부조리에 눈감고 봐주는 ‘더러운 동반자’의 역학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산중불교의 영향 탓에 한국의 사찰은 주로 산지(山地)에 위치해있다. 등산객들이 입산할 때 입장료 시비가 일기도 하고 인적이 희소한 자연에 입지한 사찰에서 배출하는 오폐수에 의한 생태계 오염의 문제도 있다. 생태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가 어차피 신도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포교를 대상삼아야 하는 양가적 입장을 전제하는 이상 자연훼손을 막기 위해서라도 도시로 나왔으면 좋겠다. 깊은 산속까지 전국 도처에 자리 잡은 불교사찰을 보는 환경적 시선이 편치 않다. 정부는 환경오염의 잣대를 사찰에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승려들이 매일 조석으로 치는 종소리조차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들에 스트레스를 줄 생물학적 개연성이 크다. 절의 종소리도 생태를 참조하면 그리 듣기 좋은 음향은 아닌 것이다.


예수는 물위를 걷고 목사/신부는 개헤엄을 친다. 그나마, ‘그’의 이적(異蹟)은 은유로 간주된다. 석가는 진리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거지가 되었지만 오늘날 이 땅의 승려는 금권(金權)을 쟁취하려고 폭력도 불사한다. 게다가, 이념에 찌들어 정권에 시비도 건다. 네가티브 릴레이에 동참하는 것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집단은 대체로 신도의 기부금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사용하는 돈은 성격상 공금일수 밖에 없는데 용처가 투명하고 종교적 목적에 부합해서 사용되는지 궁금하다. 외관컨대, 불교 쪽은 사찰을 화려하게 중수한다든지 불상을 제조하는 등 물리적 불사에 치중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신들이 자립해서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거대한 청동불상이나 아시아 최대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 불사를 벌이는 불교계의 동정을 보면 내도(內道)를 지향하는 불교의 검박한 이미지와 상반되는 유치한 행태라고 사료된다. 겉치레에 집착하지 말고 다만 깨달음의 선풍을 소박하게 진작하는 불가적 풍토가 아쉬운 것이다. 기독교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점점 매머드화하는 교회 건축의 위용을 보면 내실과는 거리가 먼 금전적 낭비로 보여진다. 불교나 기독교의 공금관리는 부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승려, 목사같은 전문수자가 직접 돈을 만지는 것보다는 별도의 재무조직을 만들어 운영함으로써 수자와 돈을 원천분리 하는 쪽으로 정향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승려가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느니 하는 언론기사가 나는 것도 종단재무가 전문교인의 수중에서 미분리된데 연유하는 패악이다.98년 조계사 법난도 따지고 보면 불교 내부에서 파벌간 힘겨루기를 하면서 돈, 권력-주지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을 서로 틀어쥐려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 서울의 모 거대교회와 관련한 교권승계가 부자간 세습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을 비판하는 세간의 여론이 있었다. 이경우도 그 지위에 따르는 프리미엄이 배제된 상황이었다면 비판의 여지가 적었을 것이다. 사찰의 주지 직책을 맡았을 때 그 개인이 누리는 일련의 혜택보다는 공적 책무가 더 크다면 누가 사욕에 사로잡혀 그 지위를 탐하겠는가. 종교집단은 시대 변천에 불구하고 매우 보수적인 위계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처음 출가한 이에게 허드렛일을 시킨다든지 하대를 한편 소위 큰스님같은 이들은 일반승려를 시종처럼 부리면서 귀족대우를 받는 악습을 지적하고 싶다. 고승대덕의 내증을 얻은 큰스님이 어째서 평등한 인간관계를 마다하고 다른 승려의 시중을 당연시 한단 말인가.

군불을 때는 등 하천한 일을 함에 있어 큰스님이든 막 출가한 신참 승려든 동등한 위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수도자로써 진정한 발심을 갖고 입문했는지 승려의 자격을 묻는 엄준한 심사도 필요하다. 불교를 비롯한 교계에는 세간 적응에 실패한 사람이나 심지어 전과자들이 섞여 있어 가끔 불미스런 사회면 기사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승려 시스템에 있어 개인이 한번 불가에 입문하면 평생 몸을 의탁하는 것이 현재의 관행이지만 이를 고쳐서 십년 정도 수도하면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일시적 수행제도로의 전환도 고려할만 하다. 일생을 전문수자로 살면서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 없이 수만 명의 승려들이 이사회에 일반인과 더불어 공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반(反)하는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기실 도를 깨치지 못한 채 인생을 허송하면서 무익한 가부좌를 틀고 염불을 구성지게 읊는 사이비승려가 상당수라고 예측한다. 세속에서 십년이면 상업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인데 이는 구도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십년 수도해서 초견성도 못한다면 그 수도자는 차후 수십 년을 허비할 개연성이 높다. 실제로도 그런 방일에 빠진 구도의 사례가 부지기수라는 심증을 갖고있다.

한편, 불교폄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장경동 목사의 언행을 분석해보면 그의 타종교에 대한 무지와 독선을 발견하게 된다. 수천 년 전통을 가진 불교, 민족종교로 내실 있는 성장을 한 원불교와 사이비교의 악명이 드높은 통일교를 등치시켜 평하는 그의 막발언은 보는 이를 아연케 한다. 그는 재능 있는 입담꾼의 인상을 주는데 이런류의 목회자는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 하나의 전형으로 굳어진 것 같다. 기독교가 지닌 태생적 한계도 있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을 매일 수없이 언명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인지하기는커녕 싸구려 목회의 핵심소재로 팔고 있는 목사/신부를 보면 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비켜간 신성(神性)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백해진다. 종교는 전근대의 유물적 지위를 언제까지 유지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민중이 신성의 허구를 깨닫고 그 유효성에 등 돌리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마침내 해체된 종교는 버블은 빠지고 핵심만 남아 수학 비슷하게 객관화 되지 않을까 예기(豫期)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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