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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 로마군에 대항해 싸우던 유대인들의 최후의 항전지인 요새 마사다. 〈Mount of Olives Press Jerusale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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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현장]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까지 ②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그 죽음마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세계 대제국 로마의 힘과 폭력과 죽음마저 넘어선 ‘인간의 요새’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0㎞. 마사다는 ‘죽음의 바다’ 사해를 바라보고 있다. 마사다(Masada)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과연 사막 가운데 사방이 절벽인 높이 434m 산 위에 궁전이 들어설 수 있는지 산 아래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산 중턱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 위에 올라서야만 이곳이 요새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백척간두처럼 서 있는 고지 위엔 무려 620m에 이르는 길이 있을 정도의 평지다. 그러면서 사방이 모두 벼랑인 희한한 지세다. 서기 72년 로마제국에 맞선유대인 독립 마지막 항전지
434m꼭대기 사방이 절벽
죽음으로 저항한 기운 ‘장엄’ 이곳을 처음 요새로 만든 것은 대제사장 요나단(기원전 160~143)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귀화인으로서 유대의 왕이 된 헤롯왕(기원전 73~4)은 내부 반란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자 이 요새에 기원전 35년 피신처를 겸한 궁전을 지어 피신했다. 건축가로서도 위대한 건축물들을 지었던 헤롯왕이었던 만큼 그가 거대한 물저장고와 호화판 목욕탕까지 갖춰 지은 궁전은 2천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다. 유대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헤롯왕이 지은 요새가 로마에 대한 유대인 반란군들의 최후 항전지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사다에서 순례단과 관광객보다 더 많이 눈에 띄는 이들은 이스라엘 군인들과 학생들이다. 이곳은 유대의 승전지가 아니다. 최악의 패배지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이곳을 최고의 순례지로 꼽는 것일까. 역사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은 서기 66~70년 독립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세계의 패자는 반란을 허용치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고 무려 110만명이 살육을 당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사람의 피가 강을 이뤄 목까지 차올라왔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30여년 전 십자가를 진 채 예루살렘의 골고다언덕을 오르던 자신을 보며 울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며 ‘유대인 최후의 날’을 예고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비극적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던 열심당원들이 쫓기고 쫓겨 최후에 맞선 곳이 마사다였다. 열심당원들의 아내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960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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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여명의 유대인들이 자살로 자유혼을 지킨 마사다의 유적을 찾은 이스라엘 젊은이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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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유적 너머 멀리 사해가 보인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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