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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14일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발대식에서 필자를 비롯한 유랑단원들이 30년 된 독일제 낡은 미니버스를 새로 꾸민 ‘꽃마차’ 위에 올라가 노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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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길 위의 신부 79
2003~04년 정부의 일방적 국책사업에 맞서 1년이 넘도록 지치지 않고 핵폐기장 터 반대 투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부안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공동체 정신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험한 일을 서로 분담하며 자신들의 결정에 자긍심을 가지며 싸웠다. 특히 여성들의 힘은 대단했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볼 수 있었던 공동체 정신이 부안에서도 다시 피어났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대책위 활동을 하던 김영표도 생각난다. 농민운동가인 그는 지난해 지병으로 운명했다. 유난히 선한 눈을 하고서 “신부님 건강하셔야 돼요” 하며 싱긋 웃던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말 그대로 ‘참여’ 정부라면 국책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미리 대다수 국민들의 의견을 묻고 참여시키는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그러질 못했고 그로 인해 초기부터 참여정부에 대한 신뢰는 심각하게 깨져갔다. 더욱이 힘을 모아 핵폐기장을 막아내긴 했지만 부안군민들은 지금까지도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생긴 골이 쉽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농촌공동체가 이해관계로 분열되고 깨지는 것은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다. 이 상황을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치유해야 하는가? 명백히 칼자루를 쥔 정부이지만 정부는 원인만 제공한 채 뒷감당은 나 몰라라 한다. 부안 문제는 평택 대추리, 제주 강정마을, 서울 용산까지 이어진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안 핵폐기장 유치를 부안에 대한 ‘선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왜 선물 받을 당사자들이 그 선물을 반길지 안 반길지 고려하지 않는가. 왜 그게 선물이 될지 독이 될지 사려 깊게 점검하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책이 이런 오류 속에서 만들어지고 강행되는 탓에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군산미군기지 사용료 문제와 오폐수 유출 문제, 소파(SOFA) 개정운동을 전개해왔다. 2001년에는 매향리에서, 2002년에는 미군 장갑차에 죽임을 당한 효순·미선이 사건으로 광화문에서 보냈다. 또 2004년에는 문규현 신부와 함께 ‘새만금 삼보일배’로 전국을 돌았고, 전국을 뜨겁게 달군 부안 ‘핵폐기장’ 논란 때는 무려 8개월을 부안 주민과 함께했다. 그렇게 평범한 대중과 만나면서 그들과 어울리며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무렵 미국이 9·11 사건을 빌미로 석유를 겨냥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국익을 위해서 전투병력이 아닌 의료·후방 지원을 맡는 지원부대를 파병한다고 결정했다. 난 놀랐다. 우리도 이미 전쟁을 겪어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분단이 된 상태이고, 이로 인해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또다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국익을 앞세워 참여한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정부가 파병을 하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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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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