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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칠레의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돌석상들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다. 엑스터시 체험자들은 강렬한 빛에 온 몸이 물들어 나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신비 체험을 했다는 경험담을 고백하곤 한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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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왜 신비주의인가
정신분열과 양극화, 갈등과 고통의 시대. 이 모든 것을 넘어선 희열을 체험하고 싶은가. 비밀주의나 사이비로 비난받아온 신비주의에 대한 재평가가 왜 요구되는가. 이성의 시대는 많은 성과를 주었지만 우리 내면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날이 질 무렵 나는 다시 태어나 동굴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빛에 의해 사로잡혔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체험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나는 일자(一者)를 보았다. 나는 태양에 흡수되었으며,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빛이 돌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창조의 근저에 자리하는 단순함 그 자체를 보았다. 그것은 언어와 마음을 넘어선 곳에 있기에 신의 도움 없이는 아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명료했던지, 우리가 그것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의 부분으로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여태 알지 못했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어 비달이 소설 <줄리언>(율리아누스)에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신비적 합일 체험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간결하지만 감동스럽다. 신비주의라는 개념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mystery cult)에서 유래했고, ‘눈이나 입을 가리다’라는 뜻의 단어 ‘무오’(muo)가 그 어원이다. 이는 비밀 엄수를 의미한다. 신비종교는 입문자들을 엄격하게 골랐으며, 가르침은 비밀로 지켜져야만 했다. 이런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우리는 신비종교의 전모를 아직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오늘날 신비주의는 인간 내면에 초월적 차원이 존재하고, 이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우리의 불멸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 재생, 불멸성의 획득 등이 그 핵심어이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가 근동의 신비종교 중 하나로 간주된 것은 놀랍지 않다.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는 ‘죽음-하계로의 여행-부활과 불멸성 획득’ 과정을 겪은 신비종교의 영웅인 오르페우스와 매우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크게 체험, 수행, 사상으로 구성된다. 체험은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비적 합일 체험을 정점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사건을 뜻한다. 수행은 체험을 얻기 위한 명상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신비 사상은 궁극적 실재와 현상 세계의 관계,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참된 본성 등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의미한다. 요컨대 삶과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개인이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동서양 종교사에 불가결한 요소로 찬탄받았던 신비주의는 동시에 숱한 오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비주의는 초자연주의와 혼동된다. 비가시적 차원을 강조하기에 비이성적인 초자연주의로 비난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물질/정신, 신/인간, 자연/초자연 등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기를 꿈꾼다. 그러니 계시, 접신, 유체이탈, 임사체험, 초능력과 같은 현상을 싸잡아 신비주의라 일컫는 건 곤란하다. 이 경험들이 신비적 합일 체험의 하위 범주로 묶일 수 있지만, 초자연 현상이 곧바로 신비주의의 전부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절대적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신비주의라 이름 붙이기 어렵다. 동시에 서양에서 유래된 탓에 신비주의는 서양의 수준 낮은 종교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특히 유신론을 폄하하는 일부 동양 종교가 이런 비난을 펼쳤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동양 종교를 가치절하할 때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태도는 전통이 인가하지 않은 종교적 주장들을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탄압했던 서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신비주의란 곧 이단에 다름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편 신비주의는 동서양 종교의 정수로 간주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이 초월의 차원을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적 태도는 자칫 궁극적 실재의 동일성에 경도되어, 교리나 수행 차원의 차이를 간과할 가능성이 크다. 또 신비적 합일 체험의 획득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이른바 ‘체험 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나라에선 신비주의를 ‘비밀주의’와 혼동하는 현상마저 생겨났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유명 인사들이 대중매체를 기피하는 것을 신비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즉, 의도적으로 노출을 피해 ‘신비롭게’ 보이려는 전략이 바로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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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녀 테레사의 엑스터시’(1647~1652),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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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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