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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라다크 고원의 계곡에서 검은 야크들이 물을 마신 뒤 풀을 뜯고 있다.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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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히말라야 오지 라다크 순례기
라다크, 히말라야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지구의 오지.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드나들어 그렇게 부르는 것조차 민망하기 짝이 없다. 이미 라다크에 대해 많이 들은 터라 나는 ‘오래된 미래’라는 환상은 접은 터였다. 라다크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레에 짐을 푼 나는 고산증이 조금 수그러든 뒤, 도시를 벗어나 티베트 사원들과 시골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레보다 더 높은 산속에 있는 헤미스 곰파(사원)를 찾아가는 길이었던가. 눈앞에 펼쳐지는 장쾌하지만 험준한 산세, 3500미터가 다 넘는 까마득히 높은 봉우리에도 만년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초록 한 그루 품지 못한 뼈만 앙상한 잿빛 바위산들만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그 산들 아래로 흐르는 인더스 강줄기를 따라가다가 가파른 계곡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물은 온통 잿빛 흙탕물이었다. 그래도 그 물이 라다크를 살리는 생명의 젖줄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까마득한 바위 벼랑에 세워진 헤미스 곰파를 경이에 찬 눈으로 둘러보고 그 뒤에도 몇 개의 곰파를 더 보았지만, 나는 이 척박하고 혹심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온 라다크 사람들의 삶으로 자꾸 시선이 쏠렸다. 설산이 흘려보낸 물을 받아 물길을 만든 곳마다 보리나 밀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보리나 밀의 크기가 겨우 한 뼘이나 될까. 물질의 풍요 속에 뒤룩뒤룩 비곗덩어리만 키워온 철없는 인간의 눈으로도 미처 자라지 못하고 낟알을 맺어야 하는 저 황량한 대지의 생명들을 바라보면서 울컥울컥 눈시울이 젖어들곤 했다. 돌투성이인 박토를 뚫고 나와 간신히 싹을 틔워 자란 저 초록의 생명들 앞에서 문명이니 지성이니 종교니 하는 허명의 옷을 걸친 채 거들먹거리는 건, 그 얼마나 가증스럽고 염치없는 일이란 말인가. 그랬다. 그 황무지에서 자라는 보리와 밀! 그것들을 보고 나서 나는 그냥 발길을 돌리고 싶었다. 헤미스 곰파에 걸려 있던 구루 파드마삼바바의 초상, 알치 곰파의 빛바랜 아름다운 벽화, 곰파 주위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초르텐(탑)들도 시큰둥한 눈길로 마지못해 둘러보긴 했으나, 어느 날 보리밭으로 들어가 이삭 하나를 손으로 쓱쓱 비벼 문득 입에 넣어본 낟알들이 라다크의 모든 것을 다 수렴해주고 있었다. 라다크의 높은 고원에서 양, 소, 말, 야크 같은 동물들에게 뜯어 먹히는, 간신히 잎을 틔워 자라는 초목들이 라다크의 메마르고 빈한한 삶을 다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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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 똥을 모아 쌓아놓은 농가 풍경. 고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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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더욱 헐벗게 하지만
훨씬 덩치가 큰 야크는
이슬과 미생물을 핥으며 산다
야크의 배설물로 자라난 보리는
황량한 라다크 사람을 키운다 한때 라다크를 ‘이상향’이라 불렀던, 그래서 누군가 ‘오래된 미래’라고 호명했던 ‘공생’과 ‘상부상조’의 미덕은 지금도 살아 있을까. 빈약한 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생존을 영위하는 짐승들 속에나 살아 있을까. 밀 보리밭을 일구고 짐승 똥을 산더미처럼 쌓아 말려 연료로 삼는 시골의 늙은 농부들 속에나 살아 있을까. 10세기께 유명한 수행자였던 나로파가 머물며 살았다는 라마유르 곰파를 찾아가는 길에, 함께 갔던 소설가 박범신 선생이 들려준 얘기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살아가는 동물 중에, 양들은 풀의 뿌리까지 모조리 뜯어 먹어 대지를 더욱 헐벗게 하는데, 야크란 동물은 덩치가 양보다 훨씬 더 크지만 어린 풀들도 송두리째 뜯어 먹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들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야크는 열심히 고원의 땅을 핥지만, 풀잎과 땅에 묻은 아침 이슬과 이슬에 묻은 미생물이나 기타 영양소들을 핥아서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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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라다크의 산. 고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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