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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타츠민다 산에서 바라본 스테판츠민다 마을. 험준한 산 아래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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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프로메테우스의 산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에 나섰을 때는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조차 없었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라는 <파우스트>의 한 대목을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허무와 대결하는 데 골몰했을 따름이다. 매 순간 요구받은 것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버둥거렸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 벌써 30년이 넘었다.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잃어버린 것 가운데 제일 쓰리게 느껴지는 것은 ‘불온함’이다. 젊음의 특권은 불온함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명징한 진리로 여기는 것에 의문부호를 붙이기 일쑤였던 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람들과 대립하기보다는 두루 원만하게 지낸다. 가끔 각을 잃어버린 사각형의 비애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나라 조지아(옛 이름은 그루지야)를 찾은 것은 길을 잃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기독교의 원형적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이들의 소박한 미소와 만나고 싶었다. 교회로부터 2개월의 휴가를 얻어 실로 오랜만에 순례길에 나섰다. 2개월 휴가 받아 떠난 순례길조지아의 츠민다 사메바 수도원
신을 거역한 채 인간을 도왔던
프로메테우스 같은 불온함 잃은 채
두루뭉술하게 변한 나를
다시 절벽 위에 세운다 하지만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차에서 젊은 기사가 혼잣소리처럼 한 뜬금없는 말이 그런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무지르고 말았다. “나는 미국을 사랑해요.”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는 가난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떠난 뒤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미래의 전망조차 보이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탈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수도 트빌리시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그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피곤하고 활기 없어 보이는 얼굴들, 특히 중년 여성들의 얼굴에 깃든 수심의 그늘이 깊었다. 타율적인 삶에 길들여진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역시 정교회의 나라였다. 택시 운전을 하는 욕쟁이 기사도, 재래시장 골목에서 과일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도 정교회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디서든 십자가가 보이면 성호를 긋는 일이 일상이었다. 심지어는 대로를 무단으로 횡단하던 이들도 길 한복판에 서서 십자가를 향해 거듭해서 십자성호를 긋곤 했다. 자기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조지아 총대주교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존경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지아로 나를 잡아당긴 것은 어디선가 본 한 장의 사진이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언덕 끝에 서 있는 츠민다 사메바 수도원(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의 전경이었다. 그 설산은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이 서린 캅카스 산맥에 속한 산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캅카스 산정의 어느 바위에 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혀야 했던 비운의 사나이다. 잔인한 것은 그 간이 밤사이에 다시 회복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 프로메테우스는 나의 영웅이었다. 나는 ‘상황은 묻고 신학은 대답한다’는 신학적 공리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방법론적 회의 너머로 나를 빨아들이는 허무의 물결 앞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길벗들이 예수가 답이라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답 없는 삶에 정직하게 직면했던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더 성실해 보였다. 그러니 주체적 판단으로 신의 뜻을 거역한 사나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사나이, 그런데도 눈빛이 흐려지지 않은 사나이 프로메테우스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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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정교회 수도사인 스테판이 은둔수도처로 만든 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현지인들은 ‘츠민다 사메바’라 부른다.) 바람에 풍화된 바위에 세월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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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츠민다 마을 위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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