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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 선사가 6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좌선 정진했던 도봉산 무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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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의 한 방에 수행자가 벽에 한 낙서. 바른 인연을 심어 자신의 근본 성품을 깨달아 생사를 기필코 타파하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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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구멍 빼고 꽉 막힌 무문관 6년 정진 뒤 자취 감춰 제선의 전설을 찾아 다시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향했다. 천축사 무문관을 지었던 정영 스님(83)이 다시 무문관을 세운 곳이다. 정영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 선사에게 제선과 같은 해 한 날에 출가했다. 제선이란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고 해서 주어졌다고 한다. 만공 선사로 부터 법(깨달음)인가를 받은 포산은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 삼아 몰려들었다. 정영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선이 “특출했다”고 회고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당차기 그지 없던 제선은 한 번 좌정하고 앉으면 움직이지 않은 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또한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해냈다. 훗날 성철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백련암의 축대는 제선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의 친척집에 묵으며 유학생활을 했던 제선은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똑똑해 그는 식민조국을 독립시킬 제목으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뒤 갑자기 쓰러지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제선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다. 폐인이 될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제선은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을 만났다. 제선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까닭을 모르고선 살 수가 없다”고 말하자 스님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제선은 그 날부터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 뜨고 염불하는가하면 어느 샌가 밭두렁에 가꾸로 처박혀 코를 골고 있었다. 스님은 그 때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42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잠이 사라져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화가난 제선이 불상의 목을 떼버리겠다며 가던 중 소매가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찰라 아들이 다가왔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하면 아들은 도망갔다. 그는 겨우 쫒아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아이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충견이 떠올랐다. 일본 친척집에 머물 때 개가 갑자기 병이 들자 친척아저씨는 그에게 개를 교외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를 애타게 좋아했던 개는 자전거에 매달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개를 떼어내고 도망치다시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는 일주일 만에 집을 찾아 왔다. 그리곤 전과 다르게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선은 인과응보를 깊이 깨달았다. 무문관 6년 정진을 마친 제선은 마중 온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간 뒤 혼자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끝이었다. 누군가는 평상복을 입고 서울의 한 판자촌에 숨어 수행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해의 외딴 섬에 산다고도 했다. 정영은 “소문을 쫒아 남해의 섬에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고 했다. 문 없는 문을, 자취 없는 자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3년 정진을 앞두고 공사 중인 대자암 무문관 방에 들어가 보니 가을 창공이 하나 가득 아닌가. 도봉산·계룡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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