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가톨릭문화유산 순례 동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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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 신부를 비롯한 순례단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의 유대인 살해 현장을 지켜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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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둘러보는 관람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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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능력 없으면 가스실로 직행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을 현장
붉은벽돌 2층건물 28개동 나란히
끔찍한 지옥 평범한 모습 놀라워
수만개 안경·3톤 머리카락 생생 유대인 돕다가 끌려온 콜베 신부
명령 어기고 수감자 상담 위로에
다른 이 대신 아사감방 수용 자청
나치, 2주 후 독극물 주사로 살해
“약자 위해 목숨 바친 종교인 귀감” 애초 이 건물들은 폴란드가 쓴 군용막사였던 것을 1940년 6월 나치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인종청소를 위한 절멸수용소로 사용했다. 전시관으로 꾸민 수용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침상들이 있고, 유대인들이 들고 온 가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도착하면 나치 군의관들이 일단 노동 가능자와 불가능자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노동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 임산부, 병자, 장애자 등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됐다. 전시실 한쪽엔 ‘샤워장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속아 유대인들이 벗은 신발 10만켤레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엔 두세살배기 아이들이 신었을 신발이 적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해된 130만명 가운데 아이들이 23만명이었다는 박물관 안내자의 설명을 듣자 순례객들의 눈이 벽면 사진에 꽂혔다. 크게 확대된 사진엔 수용소에 막 도착해서 영문을 모른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을 아이들이었다. 수감자들이 남긴 수만개의 안경들, 그리고 나치가 가발을 만들기 위해 잘라 쌓아놓은 3톤의 수감자 머리카락들이 여전히 고통으로 일그러져 울부짖고 있었다. 아우슈비츠가 이처럼 생생하게 보존된 것은 나치가 다른 절멸수용소들을 미리 폐쇄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태우거나 파괴한 반면 이곳은 그런 인멸 전에 소련군이 당도한 때문이었다. 탈의한 유대인들을 몰아넣어 유일한 천장 구멍에 독극물인 ‘치클론 B’ 가루를 넣어 짧게는 3분, 길게는 30분 만에 전원을 절멸시켰던 가스실과 주검들을 태운 소각장과 총살대, 교수대 등만이 지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은 해방이었을지 모른다. 톱밥을 섞어 구운 돌덩이 같은 빵 한개와 상한 야채로 끓인 국 한 국자로 모진 노동과 고문을 견디며 가족과 동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삶이 더 큰 지옥이었을 것이다. 이곳엔 다수의 유대인 외에도 쓰레기로 치부한 집시, 장애인, 혼혈, 동성애자,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인 등도 있었다. 인간을 소각될 쓰레기로 치부한 나치들과 달리 죽음조차도 해칠 수 없는 존엄을 보여준 이들도 있었다. 한 독일인 여성은 집시 남편과 자녀들이 끌려오자 함께 와 ‘나가라’는 나치대원들의 도움을 거부하고 가족들과 함께 가스실에 들어갔다. 또 폴란드 장교 비톨트 필레츠키는 이 수용소에 자진해서 들어와 저항조직을 만들고 내부 상황을 외부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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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대교구 프란츠 샤를 보좌주교가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카프카 수녀상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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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수용소에 수학여행을 온 이스라엘 학생들이 학살 현장을 둘러본 뒤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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