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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호 사진가 옆도 마찬가지. 한가지 재료로만 처리한 벽에 요철을 두어 리듬감이 생겨났습니다. 입구는 아주 작고 좁습니다.
▲ 김두호 사진가 내부는 바로 확 트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이 먼저 나옵니다. 마주보는 벽에는 이런 영상이 비치고 있습니다.
▲ 김두호 사진가 쪽문을 열면 뜻밖의 벽화가 나타납니다. 검은 실루엣의 소녀. 그 소녀 안에는 꽃나무가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철조망에 갇힌 처지입니다. 건물 바깥, 뒷집과의 사이, 뒷집의 축대와 이 집 사이에 난 길고 좁고 어둡고 음침한 좁은 공간이 우리가 가볼 곳입니다.
▲ 김두호 사진가 어두운 공간을 경험한 뒤 만나는 밝고 개방적인 공간이 더욱 반갑습니다만, 결코 반가워해서는 안 될 내용들이 이 안에도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니까요. 이 내부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바로 계단입니다. 계단은 그 자체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웅변하는 하나의 조형 예술 작품입니다.
▲ 김두호 사진가 1층과 2층 사이 빛우물처럼 천장을 뚫었습니다. 그 벽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8000여명의 이름 3만여 글자가 빼곡합니다. 이 전쟁과 여성인권기념관은 할머니들의 오랜 절규의 산물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2년 1월8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역사적인 집회가 열렸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사과와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집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일본 대사관과 정부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 집회에는 자연스럽게 수요집회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흘렀습니다. 수요집회는 기네스북에 오릅니다. 2002년 ‘한 주제로 가장 오래 열린 집회’로 기록된 것입니다. 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할머니들을 도와온 이들은 이 박물관을 짓자고 뜻을 모읍니다. 2003년 이야기가 시작됐고, 이듬해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꾸려집니다. 그러나 그건 무척이나 힘든 시작이었습니다. 위원회가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은 5억원. 적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박물관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기업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안하다는 거절만 이어졌습니다. “회사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나섰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돈을 모으기를 10년이 계속됐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양심적인 이들도 많았습니다. 뻔뻔한 일본 정부를 대신해 일본 시민 3000명이 이 뜻깊은 건물 짓기에 동참했고, 무려 7억원을 모어 보내주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지원한 금액보다도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20억원을 모았습니다. 좋은 소식도 정해졌습니다. 박물관 부지가 마련된 것입니다. 서울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공원. 이만한 장소도 없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러나 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부 단체들이 이 박물관이 독립공원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겉으로는 장소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표현은 “애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을 들먹이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할머니들을 ‘더러운 존재’로 취급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 할머니들은 분노했고, 가슴 속 상처는 더욱 커졌습니다. 황당한 거부 행태에 시민들이 분노해 사회적 관심이 잠시 끓어올랐지만, 결국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관은 장소를 옮겨 성미산 부근 성산동으로 지어지기로 결정됐습니다. 이미 설계까지 다 마친 상태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지어지게 된 곳이 바로 지금의 이곳 마포 성산동 건물입니다. 이 박물관은 처음부터 기쁨 대신 슬픔과 함께 시작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 다시 박물관 구경을 하겠습니다. 일반인용 공간은 아니지만 박물관인 만큼 수장고를 돌아봤습니다. 건물이 작아 수장고도 작습니다.
▲ 김두호 사진가 앞서 보셨듯 이 박물관은 이 검은 벽돌 벽이 그 자체로 할머니들을 기리는 기념비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특히 저 전면 벽은 진짜 건물 벽이 아니라 덧댄 ‘스크린 벽’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간이 생깁니다.
▲ 김두호 사진가 그 사이 구멍으로 사람들은 헌화를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자체가 제단이자 비석이자 벽이 됩니다. 벽 뒤의 진짜 벽 창문은 검게 막아 거울처럼 저 구멍 뚫린 벽 이미지가 비쳐 묘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컷. 저와 전숙희 소장입니다.
▲ 김두호 사진가 이 박물관은 정말 빠듯한 예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20억원 예산에서 이 집을 사는데 17억원 정도를 썼고, 나머지로 새롭게 고치고 더해지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건축가는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기념비성은 알맞게 살려냈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하듯 동선을 끌어가며 할머니들의 삶과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히 스토리텔링의 건축입니다. 이런 개보수는 처음부터 새로 짓는 신축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일일이 기존 건물을 실측하고, 구조를 파악하고 하나하나 현장에서 꼼꼼히 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집은 30년도 넘는 집이었습니다. 대지는 100평 남짓한 350㎡에, 고치고 더해지어도 새 건물의 전체면적은 308㎡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좁은 축대 옆 공간, 그리고 냄새 나는 지하실도 있었습니다. 건축가 부부는 서사구조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로 이런 요소들을 모두 박물관 속 이야기의 하나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절로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집은 진정 ‘이야기로 지은 집’입니다. 이 집이 들어서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슬픈 이야기가 있었고, 10년 돈을 모은 시민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후배에게 기회를 준 선배의 ‘아름다운 양보’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들의 박물관을 짓는 일을 도운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여성 건축가 김희옥(에이텍건축사사무소 대표) 소장이었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써 할머니들의 아픔을 공감해왔던 김 소장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재능 기부로 새 박물관을 설계했습니다. 그 설계가 독립공원에 지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땅이 바뀌었으니 설계도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희옥 소장은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촉망받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박물관을 설계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가에게 박물관 미술관 같은 공공건축물들은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가장 선호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사회적 의미도 크고, 건축적으로도 일반 건물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새로운 개념과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자신이 공들여 진행해온 작업을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건축계에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김 소장이 후배 건축가들을 생각한 것은 능력을 갖췄어도 실적이 없고 연륜이 짧아 중요한 건물을 설계할 기회를 얻기 어려운 젊은 건축가들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김 소장은 후배들을 위한 기회를 주자고 결심했고, 건축계는 이 제안을 받아 젊은 건축가들을 위한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공모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는 ‘젊은 건축가상’ 수상자 중 2010년과 2011년 상을 받은 네 팀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저 장영철 전숙희 소장팀이 당선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건축가는 30~40대 신진 건축가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온 이들이고, 젊은 건축가상까지 받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사무실을 차린 지 오래되지 않아 실제 이뤄진 건축 작업은 별로 없었습니다. 건물로 지어진 작품은 2개뿐인 이들이 선배가 양보해 생긴 공모전 덕분에 비로소 ‘일 다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이 박물관은 처음 시도해보는 공공건축물이었습니다.
▲ 김두호 사진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작습니다. 웅장하고 근엄한 상징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규모의 한계와 주택가란 입지 제약을 잘 극복해낸 건물입니다. 벽돌이란 소재로 튀지 않으면서도 기념비성과 상징성을 잘 표현했고, 디자인 못잖게 스토리텔링을 추구한 동선이 돋보입니다. 스크린 벽을 덧댄 이중 외피 구조여서 내부와 외부가 교차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풍경과 표정이 만들어지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매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건물 옹벽을 건물과 같은 전벽돌로 처리해 건물과 벽이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게 한 점입니다. 건축가 부부는 기존 단독주택을 처음 본 순간 ‘이건 벽돌이다’라고 동시에 느꼈다고 합니다. 검은 전벽돌은 특히 기념비성을 강조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고, 벽돌이란 재료 자체의 특성도 중요했다고 합니다. “벽돌은 하나하나 쌓여서 큰 덩어리가 되잖아요. 이 박물관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이 모았으니까. 벽돌을 쌓는 시공방식이 이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을 상징하리라는 느낌이 처음부터 들었어요.” 건물은 작지만 외벽에 붙인 벽돌의 숫자는 5만장이 넘습니다. 벽돌로 건물을 덮으면서 건축가가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옹벽까지 벽돌로 처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도 건물이 조금이라도 더 커보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설계를 하게 되고 나서 수요집회 현장에 나갔어요. 그런데 꿈에 그리던 박물관을 짓게 되었는데도 할머니들은 마치 이 꿈이 좌절된 것처럼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원래 짓기로 했던 독립공원 건물이 아니니까, 건물이 작으니까요. 그래서 작은 박물관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옹벽이 중요해진 거죠. 건물만 보면 작지만 3미터 높이 옹벽을 같은 디자인으로 하면 훨씬 커보일 테니까요.” 박물관은 완공됐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의 한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수요집회는 그 사이 20년을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 터인 독립공원 부지에 박물관을 짓는 꿈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답니다. 건축은 여러가지를 담습니다. 때론 분노를 일깨우는 건물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치유를 시도하는 건물도 필요하죠. 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분노와 치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하게 하는 건물입니다. 문득 새로운 건물, 뜻깊은 건물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조용한 주택가 속에 자리 잡은 저 박물관을 한번 가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어두움을 외면할 때 어두운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글 구본준 기자 / 사진 김두호 건축전문사진가 # 이 박물관에 가는 법:
http://www.womenandwar.net/contents/general/generalView.asp?page_str_menu=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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