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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선암 수술 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김경자(가명)씨가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의 한 호스피스 쉼터에서 마스크를 쓰고 병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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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보 신청자 울리는 ‘확인서류들’
20년전 헤어져 못본 아들이부양기피 사유서 안냈다고
독거 암환자 수급신청 거부
잊혀진 가족에 포기각서 요구
시민단체들 인권위에 진정서
인권위 “인권침해 소지 점검” 지난 19일, 서울의 한 호스피스 쉼터. 무더운 날씨에도 김경자(가명·53·경기도 오산)씨는 두꺼운 모자에 환자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벗자 암환자 특유의 민머리가 드러났다. 한뼘이 넘는 목 수술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다. “얼굴 반쪽은 감각이 없어요.” 의사는 수술 후유증이 평생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구토도 심하지만, 그가 최근 겪은 마음 고생에 견주면 오히려 견딜 만하다. 20년 전 이혼한 김씨는 식당 주방일 등을 하며 홀로 살아왔다. 그러다 올 초 병원에서 ‘편도선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가난 탓에 치료도 포기한 채 방황했다. 한 대형 병원의 도움으로 5월에 겨우 수술을 하고, 한번에 6시간 걸리는 고통스런 항암주사를 12번째 맞고 있다. 병원 근처 한 교회에서 마련한 암환자 호스피스 쉼터에 머물며 통원치료중이지만, 값비싼 항암 치료를 언제 갑자기 중단하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 생활비는 벌써 바닥이다. 그는 지난 4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20년 전 헤어진 아들의 연봉이 3000만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씨는 “이제 와서 병든 몸으로, 아들에게 먹여살리라고 할 수 없는데, 나라가 아들을 괴롭힌다”고 울면서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 아들이 죄인입니까? 공무원이 아들한테 부양 의사 확인차 전화를 했다는데 아들이 ‘머뭇머뭇’ 했답니다. 20년 헤어져 산 엄마가 암에 걸렸다지, 나라에선 전화를 해대지….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김씨의 아들과 통화했다는 동주민센터 관계자는 “아들이 부양을 거부하는 것 같긴 한데 ‘부양기피 사유서’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도움을 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가 되려면 소득인정액(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이 최저생계비(1인 월 55만3354원) 이하여야 하고,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1촌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가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여야 한다. 부모나 자식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유서를 내야 한다. 대학생 김태훈(가명·22)씨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김씨는 6살이던 1996년부터 2010년까지 보육시설에서 자랐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4년제 대학에 합격하고, 수급 신청을 했지만 사회복지통합관리망(사통망)에서 ‘아버지’가 발견돼 거부당했다. 아버지가 양육권을 포기하고 나서야 겨우 수급을 받게 됐지만, 두번째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생계비가 끊겼다. 이번엔 어머니가 문제였다. 김씨는 “생존 여부도 몰랐던 어머니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이었는데, 관계가 단절됐다는 사유서를 최대한 불쌍하게 써내라는 얘기를 동사무소에서 듣고 울면서 글을 썼다”고 했다. “(국가가) 우리를 사람으로 보는 것 같지 않았어요.” ‘내 자식, 내 부모와의 관계 단절’을 증명하라는 ‘사유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빈곤층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보건복지부는 2010년 초 사통망을 만든 뒤 부양의무자를 자동으로 찾아낼 수 있도록 대법원의 가족관계증명(옛 호적)을 수급자관리시스템에 연결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던 가족관계며 연락조차 끊어진 부모·자식의 이름과 주소가 줄줄이 복지 담당 공무원의 컴퓨터에 뜨게 됐다. 국가가 ‘잊혀진’ 가족을 찾아낼 수 있게 되자, 실제 ‘남남’이라는 증명을 수급 신청자들이 제출하도록 강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계 단절 확인서’와 ‘부양기피 사유서’다. 사생활 침해 소지가 크다. 이런 까닭에 최근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동자동사랑방, 빈곤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인권침해 사례를 적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인권위 쪽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단돼 정책 전반의 문제를 점검중”이라고 밝혔다.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조직국장은 “수급자가 되려면 신청자들이 낯선 공무원들에게 자신의 삶과 가정사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례가 심각할 정도로 많다”고 말했다. 인천의 빈곤아동 공부방인 ‘기찻길옆 작은학교’의 활동가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인 김중미씨는 “보육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입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부모라는 존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신에 대한 ‘포기각서’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빈곤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공무원이 수급 신청자를 대신해 ‘관계 단절’ 등에 대한 증명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지만, 잘 활용되지 않고 있다”면서도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거나 추가 완화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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