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20 20:55
수정 : 2013.11.21 08:31
“수술 위험·경제적 부담도 커”
성전환자 30명 정정요청 수용
성소수자 인권법 연구회 꾸려
8개월 머리 맞댄 획기적 결정
‘나에게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삶의 방식을 함께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
서울서부지법(법원장 강영호)이 내놓은 ‘관용’의 정의다. 서울서부지법은 헌법 1조의 ‘민주국가’는 이런 ‘관용’ 아래서 이뤄진다며, 성기 성형 수술을 하지 않아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는 결정을 지난 3월에 이어 또다시 내놨다. 법원 자체적으로 ‘성소수자 인권법 연구회’를 꾸려 8개월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외부 성기 형성’을 성별 정정의 필수요건으로 삼는 것은 위헌성이 짙다는 이론적 근거까지 명확히 했다. 획기적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서부지법은 유방·난관 등 여성 생식기 제거 수술은 받았지만 외부 성기 성형 수술은 하지 않은 ㄱ(29)씨 등 성전환 남성 30명이 법적인 성별을 ‘여’에서 ‘남’으로 바꿔달라며 낸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성별 정정)’ 신청을 받아들였다고 20일 밝혔다. 법원은 “ㄱ씨가 이미 남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이 확고하고 주변에서도 남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여성으로 돼 있어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허가 이유를 설명했다.
ㄱ씨는 고교시절 운동선수로 활동하고 한 대학이 스카우트까지 제안했지만 여자선수로 뛰기를 원치 않아 대학 진학과 운동을 포기했을 정도로 확고한 남성 성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6년 전부터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했고 2008년 유방 절제술, 지난해 난관 절제술을 받아 여성 생식기능을 없앴다. 가족들도 ㄱ씨를 남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관계등록부상 여성이라는 걸림돌 탓에 취직이 안 돼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고, 병원에 가거나 선거에 참여하는 일도 어려웠다.
법원은 남성으로의 성별 정정 허가에서 외부 성기 성형을 절대적 잣대로 삼는 것은 위헌성을 띤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성별 정정을 위해 외부 성기 형성 수술을 필수적으로 거치게 하는 것은 성정체성에 따른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수술에 따른 위험과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으로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성별 정정 결정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기본권 보호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므로, 외부 성기 형성이 기본권 침해로 보이는데도 이를 절대적 요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의미를 반감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서부지법은 지난 3월 비슷한 사례에 대한 성별 정정 허가 결정(<한겨레> 3월16일치 1면 참조)을 내린 뒤 뜻있는 판사·재판연구원 등 15명이 참여한 ‘성소수자 인권법 연구회’를 구성했다. 이들의 연구 결과를 반영해 법원은 스페인·스웨덴·핀란드 등 여러나라의 법률·판례도 성별 정정에 성전환 수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결정문에 보탰다.
ㄱ씨의 대리인인 한가람 변호사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외부 성기 형성 요건’의 위헌성을 명확히 밝힌 역사적 결정이다. 외국의 경우는 신체의 온전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성별 정정을 위해 성전환 수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다른 법원에서도 진전된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단체도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연대하는 언니네트워크의 몽 활동가는 “성소수자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넘어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까지 제시한 결정으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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