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09 19:59
수정 : 2014.12.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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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상도동 성대시장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대륙서점을 27년간 지키고 있는 양성훈씨.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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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나선 서점 주인 양성훈씨
도서정가제 개정 법률이 시행된 지 일주일째인 지난달 27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대륙서점을 찾았다. 성대시장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40㎡(12평) 남짓한 동네서점을 양성훈(69)·남덕임(67) 부부가 지키고 있었다. 양씨는 “아직 새 도서정가제의 효과를 느낄 수 없다”며 “내년 신학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7년 맞은편에 있던 서점을 인수해 이 자리로 옮겨 문을 연 지 27년이 지났지만 이제는 한계에 부닥쳤다. 십여년 전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이 늘어나면서 운영이 급격히 어려워졌고, 5년 전부터는 이익이 사실상 없는 상태다.
“새 도서정가제 시행 전에는 서점에 들어오는 가격보다 인터넷 판매가가 더 싸니 가격경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온라인서점에서 한 권만 구입하려니 택배비가 아까워서 서점을 찾는 손님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식의 이삭줍기로는 임대료도 맞추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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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서울 청계천 수상패션쇼에 양성훈·남덕임 부부가 한복을 입고 모델로 나섰다. 양성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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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 남씨가 “아저씨가 아르바이트로 모델을 해서 서점 적자를 겨우 메우고 있다”고 한마디 했다. 양씨는 2009년부터 노인모델로 활약하며 각종 영화·홈쇼핑·드라마 등에 출연하고 있다. 지금은 영화 <간신>의 단역을 맡아 촬영 중이다. 총 9회 촬영분 중 4회를 소화했는데 대부분 1박2일 촬영이라 밤샘도 감수해야 한다. 양씨는 “젊었을 때 태권도 사범을 하면서 운동을 많이 했고, 지금도 건강관리는 꾸준히 하고 있어 체력적인 부담은 전혀 못 느낀다”고 말했다.
양씨가 모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들 덕분이었다. 수려한 외모로 젊을 때부터 ‘연예계에 나가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생계로 바빴던 아버지의 인생 후반전을 위해 2008년 아들이 시니어모델 아카데미를 추천했다. 아버지는 아카데미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연기·패션·무용을 배웠고, 아들은 아버지의 프로필을 만들어 모델 대행사에 뿌렸다. 2009년 처음으로 모델 의뢰가 들어왔다. 가발 모델이었다.
“제일 어려운 게 웃는 거였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활짝 웃을 일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몇시간씩 계속 웃어야 하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스태프들한테 ‘그게 웃는 거냐’는 타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해 7월엔 서울메트로가 주최한 실버패션쇼에 모델로 나섰다. 패션쇼가 끝나고 며칠 뒤 지하철을 탔는데 그 패션쇼 영상이 전동차 화면에서 나오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 3명이 영상과 양씨를 번갈아 보더니 “저 모델이 아저씨냐”며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아내 남씨도 모델로 데뷔했다. 서울 청계천 수상패션쇼에 부부가 한복을 입고 모델로 나섰다. 양씨는 아내와 관객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기획했다. 장미 한 송이를 옷 속에 숨기고 있다가 무대의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선물한 것이다.
“런웨이를 걸어갔다 그냥 들어오기 밋밋할 것 같아 아내 몰래 기획한 건데 소위 ‘대박’이 났습니다. 평생 그런 이벤트는 못 했는데 아내보다 관객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그 뒤로 부부가 함께 모델로 나서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는 서점 문을 닫고 나갑니다. 서점 적자를 메울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양씨는 현재 서초구립 양재노인종합복지관과 우리마포시니어클럽에서 노인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두 곳에서 전문강사가 가르치는 연기·워킹 강의를 정기적으로 배우고 있다.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어르신일자리사업이라 수강료도 무료다. 공공기관의 노인모델 사업은 2008년 양재노인종합복지관에서 ‘고령화 사회가 될수록 노인모델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어르신의 젊었을 적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처음 시작했다. 현재 서울에서는 서초·마포·강남 등에서 노인모델 일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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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에는 양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백세운동교실’ 홍보영상을 찍었다. 양성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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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모델을 하면서 삶이 정말 활기차졌습니다. 정년퇴직한 친구들은 갈 데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서점과 모델을 병행하느라 시간이 없어요. 복지관에서 무료로 잘 가르쳐주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다른 노인모델들도 ‘건강이 좋아지고 행복감을 느낀다’고 해요. 노인모델은 인물이 잘나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건강·자세 관리를 평소에 잘 하신 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늙었다고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을 믿고 노인모델에 도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노인모델 수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영화 단역은 하루 10만원꼴이다. 홈쇼핑 등 광고모델도 대부분 몇십만원 수준이다. 벌써 6년차 모델이지만 양씨는 한 달에 3~5번 촬영해서 50만~100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이 수입으로 서점의 적자를 메우고 있지만, 내년 신학기에도 기대했던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적자폭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서점 문을 닫는 게 맞는 상황인데, 나이 들어서 실업자 소리도 듣기 싫고, 마을에 서점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버티고 있습니다. 20년 넘게 주민들 덕분에 먹고살았으니 큰 적자만 안 볼 수 있다면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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