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12 16:14
수정 : 2006.02.12 16:14
아낌없이 주는 나무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청주에 사는 막내 누나네 집들이에 갔다가 온천 목욕을 하게 됐다. 원래 뜨거운 물을 싫어하는 지라 지금까지 한 번도 온천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유명하다는 초정리 온천이라 구미가 당겼다. 팔순을 훨씬 넘기신 아버지께 온천욕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막상 온천에 들어가자 신이 나서 쑥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한동안 탕 안에 몸을 담근 뒤 아버지의 등을 밀어 드렸다. 아버지의 등을 밀다가 나는 잠시 목이 메어오기도 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탄탄하고 강단 있는 몸을 지니신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아버지는 살이란 살은 다 잃어버리고 뼈와 가죽만 남은 분이 되고 말았다. 세월 속에 아버지의 몸이 점점 사위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새삼 느꼈다. 아버지 등을 다 밀고 나자,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내 등을 밀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우리 늦둥이 진형이의 몸을 씻겨주었다.
며칠 뒤 다시 만난 아버지께서 갑자기 뽕나무 이야기를 꺼내셨다. “올해는 뽕나무를 좀 심어야겠다. 오디가 전망이 좋다더라.” 이미 묘목상에게 전화를 해 뽕나무 재배 책자까지 받으신 모양이었다. 여든이 훨씬 넘으신 분이, 뽕나무를 심어 오디를 수확하실 꿈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시는 것을 보며, 나는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아버지는 평생 나무 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해 오신 분이다. 잠시 산을 둘러보러 가실 때도 꼭 낫을 준비하신다.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칡넝쿨을 끊어주고, 가지치기도 해주려는 의도에서다. 몇 해 전에는 은행나무를 사오라고 하시더니, 시골 집 앞밭에 그 은행나무를 가득 심으셨다.
“한 십 년이면 은행나무가 제법 큼직해질 게다. 은행알도 털고 노란 잎도 구경하면 좋을 거야.”
아버지는 손자인 진형이를 그윽이 바라보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은행나무를 심으며, 아름드리로 자랄 은행나무와, 그 은행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심은 할아버지를 그리워할 당신의 손자들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쯤이면 내 아이들도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를 할아버지처럼 보아줄 것이다.
뽕나무 이야기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큰 나무처럼 보인다. 세월을 뛰어넘는 꿈을 가꾸고 계신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의 모습을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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