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70년 연예인들이 많고 장수한다는 흔한 사실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패션이라는 사고를 생활에서 느끼며 살았고 386세대와는 다른 행동 양태를 가지고 대학 생활을 했으며 무차별적인 생존 경쟁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자율화는 잠깐의 해방이었고 제 막내 동생부터는 갑자기 교복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다양한 교복의 재생이었지만 그 때의 논리는 통제의 용이성과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것이었죠... 자유로운 의상이 빈부격차를 조장하고 소위 끼리문화를 조성한다는 학교 측의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진 이야기가 자율화 시행 때 처럼 갑자기 부곽하기 시작하며 지금은 교복입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무소신의 전형이 교복 정책인거죠...^&* 경제적인 좀 다른 측면을 이야기 하자면 교복 부활은 교복 산업을 왜곡되게 끌고가는 단초를 제공한 것인데 원가의 수 배를 상회하는 가격으로 저질의 교복을 양산하는 현실을 몰고 왔습니다. 박리다매가 가능한 교복 산업에서 학교와 업체간의 검은 거래는 관행화 되었고 왜 단기간에 교복 부활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는거죠. 교복의 문제는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학교의 자유로운 결정이라면 획일적인 교복 정책을 벗어나 자율복을 입는 학교도 당연히 많아야 하는데, 다양한 이권 집단의 요구로 교복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교복을 직접 입는 학생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고 학교와 교사, 학부모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잘못된 교육 구조가 얼마나 학생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는 고려의 대상도 아니죠... 몸에 맞는 옷을 골라서 입을 권리가 학생들에게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학생은 예뻐 보이면 안되는가? 자율과 민주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억압과 폭력을 가르치고 있는것은 아닌가? 다양한 이권 단체의 개입으로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런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면, 왜 2006년에 실비아님이 "난 벗고 싶다"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는지도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자유로운 생각, 다양성의 추구는 교육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좀 더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도출해 나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는 상식을 지켜 나갈 때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고 미래를 열어 나갈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교복 자율과 전교조 탄생...일률적인 운동의 변화와 다양성의 추구가 70년 세대를 변하게 만들었다면 21세기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는 어떤 변화를 준비하고 계획해야 될 것인가? 그런 변화는 아래에서 부터 지금 그 잘못을 지적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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