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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 재현 계기, 한-일 진정한 이웃되길 |
그리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올해는 ‘한일 우정의 해’이다.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이 다시 국교를 맺었으므로, 그 40주년이 되는 올해를 기점으로 흔히 말하는 ‘가깝고도 먼’ 관계를 넘어서 진정한 이웃이 되자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시대 두 나라 사이의 가장 대표적인 교류가 조선통신사였다. 이 때문에 ‘한일 우정의 해’ 기념 행사의 하나로 조선통신사 행렬이 출발지인 부산과 도착지인 도쿄에서 재연된다고 한다.
조선은 일본과 가급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교류를 하는 정책을 취했다. 지금의 부산 근처에 왜관을 설치하고, 그곳을 통해 무역을 하도록 한 것은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두 나라는 어떤 일이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사절을 주고 받았는데, 조선이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했다. ‘통신’이란 신의를 가지고 교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세종 때인 1428년 처음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조선 전기에는 왜구의 금지를 요구하거나 외교관계를 여는 등 정치·외교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이 왜관 등지에서 난동을 일으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상당 기간 끊어지고, 통신사의 파견도 중지되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1592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일본은 7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일본에서 새로 권력을 잡은 에도막부는 조선에 다시 외교관계를 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1607년 ‘회답겸 쇄환사’라는 이름의 사절을 파견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군 포로와 일반인들을 돌려받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사실상 통신사의 파견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1636년 파견된 사절부터 다시 ‘통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후기 통신사는 주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쇼군이 바뀔 때, 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됐다.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됐는데, 도쿄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통신사는 사신과 수행원을 포함해 대체로 300~500명 규모였다. 통신사 일행은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육로로 간 다음, 쓰시마 도주의 협조를 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육로로 쇼군이 있는 도쿄까지 갔다.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학문이나 사상, 기술 등이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 이들이 남긴 글이나 견문록, 통신사 행렬을 그린 그림 등은 당시 일본의 문물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 통신사 행렬 재연 행사의 취지대로, 올해가 한국과 일본이 바람직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그런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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