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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4 10:53 수정 : 2005.02.14 10:53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적으면 즐겁게 일기쓰기를 할 수 있다. 그래야 아이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다. 서창환(10·왼쪽), 수경(8) 남매가 책상에 일기장을 펴 놓고 앉아 있다.


“우리집 부자야. 과자도 만은대 산양우유는 안조아. 아토피가 도돌도돌 나서 나는 산양우유를 안먹고 싶어 한살림 과자를 조금씩 먹고 있어.”(서수경·1년)

“친구가 놀러 왔다. 뛰다니며 신나서 노는데 아빠가 시끄럽다고 소리쳤다. 나중에 친구들이 간 다음에 아빠한테 ‘패버리고 싶었어’라고 말했다.”(서창환·3년)

서울 우이초등학교에 다니는 서수경양과 서창환군이 쓴 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각각 7살 때부터 써 온 두 남매의 일기는 여느 일기와 다른 데가 많다. 철자법이 틀리거나 문장이 엉성한 곳이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는가 하면 욕이나 비속어, 은어, 약어 등도 거침없이 나온다. 글 외에 그림, 기사 스크랩, 사진, 각종 메모지 등이 너덜너덜 붙어 있기도 하다. 넘기다 보면 동시도 나오고 산수 계산을 한 흔적도 보인다. 일반 공책이 아닌 종합장이나, 스케치북에 일기를 쓴 점도 독특하다.

“일기는 삶의 소중한 기록입니다. 아이들이 어디에 가서, 뭘 하고,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그대로 담는게 중요하죠. 그래서 욕도 들어가고 그림도 들어가고 사진도 들어가는 게 당연하지요. 가짜 삶을 기록으로 남겨 봐야 나중에 무슨 느낌이 들겠습니까?”

남매의 어머니 오호선(40)씨의 설명이다. 그는 “생활 과정, 성장 과정을 담으면 그게 가 일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특별한 주제가 있을 필요도 없고, 틀이나 순서,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의 궤적을 기록한 것이 일기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일기쓰기다. 포털사이트인 티나라(tnara.net)가 지난달 전국 초등학생 78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보니, 절반에 가까운 47%가 가장 싫은 방학숙제로 일기쓰기를 꼽았다. 때문에 방학숙제로 일기쓰기를 내 주면 내내 안쓰다가 개학 며칠 앞두고 몰아치기로 쓰는 일은 여전한 편이다.

하지만 창환·수경 남매처럼 일상을 그대로 옮긴다는 생각으로 쓴다면 일기쓰기는 결코 힘들거나 짜증난 일이 아니라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청주 경산초등학교 정혜옥 교사는 “쓰고 싶거나 남기고 싶은 내용을 자기 맘껏 표현하도록 부추기다 보면 스스로 재미를 느껴 시키지 않아도 일기를 쓰는 습관이 들게 된다”고 말했다.

즐거운 일기쓰기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적는 데서 시작해 볼 수 있다. 아동문학가 고 이오덕 선생의 “말과 글은 똑같아야 한다”는 말처럼 입말이 그대로 글로 표현됐을 때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호선씨는 “하루의 일과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일을 부모가 아이와 함께 이야기로 풀어 나간 뒤, 한 이야기를 그대로 쓰면 된다고 알려 주면 글 표현에 부담을 느끼던 아이가 어렵지 않게 일기를 써 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990002%%

시간 순서대로 하루에 있었던 일을 죽 써 보게 할 수도 있다. 또는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동시로 써 보는 방법도 있다.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편지를 쓰거나, 역사책이나 과학책을 읽고 그 자료를 기록하는 것도 ‘즐거운 일기쓰기’의 지름길이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두고 있는 이지영(37·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내용이나 형식에 관계없이 삶과 공부, 놀이, 그 모든 것이 일기의 소재가 되도록 한다면 아이의 표현력과 상상력은 부모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하고 커 간다”고 말했다.

흔히들 부모가 자녀의 일기를 보면서 틀린 글자를 고쳐 주고 문장을 다듬어 주는데, 이런 일은 되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창원 사파초등학교 최진수 교사는 “일기는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뒤돌아보는 과정”이라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엉성한 구성 등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고쳐지기 때문에 사소한 일로 아이의 기를 죽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일기를 날마다 검사해서는 안된다. 건국대 류태영 교수는 “일기는 아이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며 “그런데 매번 검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아예 일기 쓰는 것을 포기하거나 보여 주기 위한 일기를 쓰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류 교수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억지로 보게 되면 아이는 소중한 마음의 친구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라며 “정 걱정이 된다면 아이가 일기를 쓰고 있는지 확인만 하라”고 충고했다.

서울 동대부고 김용진 교사는 “나이 들어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추억이고,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며 “어려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삶의 궤적인 일기를 쓰는 것은 아이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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