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3.03 16:08 수정 : 2006.03.03 16:08

국어국문, 사학, 철학 등 인문과학 분야의 기초 학문의 고사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70년대, 비평가 김현이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푸념 ‘아들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문학 나부랭이를 한다’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내린 후에도 이 땅의 어른은 계속해 같은 말을 해왔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도 암암리에 동조해 소위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찾고 토익을 공부했다. 가족이 바라고 자식이 따르는, 더 크게는 사회가 바라고 개인이 따르는 이상적 구조라 할 수 있을까? 정말 잘 살면 그만일까?

여기서 인문학의 필요성과 효과 등을 일일이 살피지 않겠다. 하나하나 써내려가야 인문학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은, 다른 경제적인 일을 하시길 바란다.

계속해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됨은 일반인이 인문서적을 일독하지 않았음이 원인이겠지만, 문제와 답은 이 같은 농담 따먹기로 내릴 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문학의 기초 학문에 대한 폄시(貶視 : 낮게 깔아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인문적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라 할 수 있다.

어른들은 말한다. 옛날이야 먹고 살기 힘드니까 기술을 배워서 당장 하루의 끼니를 때울 수 있으면 족했다. 거기에 현재의 우리는 덧붙인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조금 적게 읽어도, 교양은 약간 부족해도 생활에 하등의 부족함이 없다. 사실 부모 세대는 책을 읽고 싶어도 못 읽는 경우가 허다했음을 감안 하면 현재 우리의 게으름은 분명 윗세대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인문과학의 기초학문에 계속해 종사하기를 원하는 대학원생의 경우는 앞서 말한 게으름과는 다른 문제가 있다. 학자가 되기 위한 공부가 자본이기 때문에 자본이 일정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 팔아먹을(?) 수 없다는 문제이다. 덧붙여,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끈질기게 써내려 가는 작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구체화된 패트런(patron : 단골)이 없기 때문이다. 논의가 피상적이니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다.

A씨는 교육대학원을 다니다 좀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 일반대학원에 진학했다. 현재 그의 나이는 만으로 스물아홉이다. 대학원의 일년 동안은 전에 입시학원 강사로 벌어 두었던 돈으로 생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민하고 써내려가야 할 분량이 많아지자 더 이상 학원 강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제 조교자리와 교내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책값도 감당하기 힘들다. 서른 가까이 된 나이에 부모님께 손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지금 자퇴를 고민 중이다.

아무도 A씨가 공부하는 과정에, 그러니까 자본을 생성하는 과정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가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고 성실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돈으로 바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책임은 학교와 사회에 있다. 꿈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젊은이에게 책임을 돌릴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올해 이화여대 대학원의 등록금이 오백만원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통 한 학기에 십오 주에서 십육 주의 수업을 하니 정말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한달에 백만 원 가량을 저축해야 다음 학기를 수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개인의 꿈이 인문학에 있다고 이러한 경제적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니 학교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

범박하나마 예비학자의 경제적 난국을 보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넓게는 인문학의 패트런(patron : 단골) 확보와 연관될 수 있다. 우선, 대학원생이 기고할 수 있는 학회지를 만들고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한다. 이는 대학원간의 연계를 통해 단일 학교 내에서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하지 말고 수개의 학교가 과별로 묶여 학회를 열고 학회지를 발행해야한다. 물론 원고료를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하겠다.

그리고 인문학이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사회 구성원이 골고루 해택을 볼 수 있는 학문임을 교육해야한다. 이를 위해 각 대학들은 시민대학을 개설하고 강사로 대학원생을 활용해할 수 있다. 접하기 어렵던 철학서나 예술사를 이해함으로써 일반 사회 구성원들의 인문학에 대한 폄시를 걷어낼 수 있다. 더불어 강사로서 외국인의 한국어 교육에 대학원생을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뤄져야함을 말하고 싶다. 인문학에 대한 폄시(貶視)는 현재 활동 중인 인문학자에게도 일정량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사회로 환원되는 지식의 양이 극히 적기 때문에 사회의 구성원들은 인문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문학의 만남을 예비학자인 대학원생을 통해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일정량 답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A씨는 자퇴를 결심한 후에도 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와 그의 꿈이 부자에게만 허용되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책 읽고 물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