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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9 16:59 수정 : 2006.03.09 16:59

대학의 강의의 분위기와 질적 차이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태도가 결정한다. 필진네트워크 작은파랑새.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가니 '선생님'이 '교수님'으로 바뀌고 '수업'이 '강의'로 바뀌고 '내신'이 '학점'으로 바뀌었다. 내가 느끼기엔 가리키는 대상은 같고 단어만 바뀐 것 같은데도 그 단어들이 주는 분위기와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서 아직도 대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은 '교수님'과 '학생'의 관계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교실에 앉아 들어오는 선생님의 수업을 받았으나 대학생이 되니 어째 내가 교수님을 찾아 강의를 듣는다. 같은 제목의 강의일지라도 그것을 담당하는 교수님이 여럿이면 선배들에게 어떤 교수님이 괜찮은 지 추천을 받고 가장 마음에 드는 교수님의 강의를 선택해야 한다.

교수님을 '선택'을 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저마다 '기준'이 다르다. 까다로운 학생들은 인터넷 쇼핑몰의 옷을 고르는 마음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보며 꼼꼼이 따지기도 한다. 그 모습이 나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도 좋은 교수님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강의명을 6분의 교수님이 담당하고 계셔서, 수강신청 기간 중 다들 교수님들 키재기가 일어났다.

나는 알고 있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좋은 교수님을 추천 받았다. 과제를 자주 내주지만 그 과제의 주제가 결코 시시콜콜하지 않으며, 토론이나 영화, 책 등을 통해 다양한 수업을 도모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 결정적으로 학생들을 사랑한다는 말에 나도 선뜻 마음이 내켜 그 교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둔 듯 싶었고 어느 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너는 어떤 교수님 수업 듣기로 했어?"


"응? 나는 ○○○교수님."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질색을 하며 말한다.

"뭐? 왜? 그 교수님 진짜 안 좋다던데! △△△교수님이 짱이래! 진짜 좋대."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좋다고 알고 있는 교수님이 다른 아이들이 다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 사람이라니, 과연 그 강의를 들어야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이내 사라졌다.

"△△△교수님이 잘 가르치신대?"

라는 내 질문에 그들이 일제히 대답한 것은,

"아-니, 학점 잘 준대."

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앉아만 있어도 될 정도로 질문도 하지 않고, 자는 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과제도 거의 없다고 한다. 또 학점도 잘 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1순위로 선호하는 교수님이라는 것이었다. 수강신청 할 때 정원이 다 찰까봐 노심초사했다는, 다행히 운이 좋아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며 무슨 횡재라도 한 듯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참 씁쓸했다.

이 교수님이 좋은지, 저 교수님이 좋은지 이리 재고 저리 재보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알차고 깊이 있는 수업을 받기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객관화된 점수로 1등부터 꼴찌까지 나누고 있다. 1과 가까운 숫자를 얻을 수 있도록 발버둥치는 세상인가 보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혼자 있고 싶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있는데, 화장실 앞에 그런 말이 적혀있었다. 체 게바라의 말이다.

 리얼리스트가 돼라.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져라.

그러나 나는 지금 리얼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불가능한 꿈이 큰 창창한 젊은이이다. 체도 불가능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리얼리스트가 되라는 뜻으로 저런 말을 했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나는 답답한 가슴을 추스렸다.

교수님의 수업은 들은 대로 좋았다. 가르치려는 의욕과 열린 자세가 참 마음에 들었고 기분 좋아지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이 분의 수업 환경은 다른 교수분들에 비해 열악했다. 수강하는 학생들이 적기 때문인지 가장 좋지 않은 강의실이 배정된 것이다.

그런데 왜 난 더 기분이 좋을까?

마치 남들이 알고 있지 못하는 진주를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 것인가 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좋은 교수님'의 기준은 학점을 잘 주느냐에 있어서는 안 되며, 강의의 질로 평가되어야 한다. 어떤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그래도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기분 좋고 행복했는데, 요즘은 내가 피하게 되더라구.

이 학생이라는 것들이 나를 학점 주는 사람으로만 보는 모양인지 기껏 이야기 즐겁게 해놓고 끝에 한다는 말이 "학점 잘 주세요!" 니까 도무지 이야기 할 맛이 나야지."

자신의 '강의'를 듣고 싶어 찾아오는 학생들이 예쁘지, 자신의 '학점인심'에 혹해 찾아오는 학생들이 예쁠리 만무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점점 자기의 '학점인심'이 마음에 들어 찾아오는 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수업을 준비하려는 의욕도 줄어들고, 그냥 저냥 시간만 때우게 될 때도 있다며 한숨을 쉬는 교수님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선, 학생들이 수업을 선택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의 분위기와 질적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첫번째로 '선생님'이고 그 다음이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 자신이 기대하는 수업까지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작위로 앉혀진 학생들의 생각을 맞춰나가면서 수업을 조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는 그 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자신의 강의를 학생들이 직접 선택하기 때문에, 교수들은 학생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강의를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실로 참된 강의를 받고 싶은 학생들이 강의실에 앉아있다면, 한 학기 강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할 지라도 더 좋은 강의를 하기 위해 늘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대로, 학점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자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강의실에 앉아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 놓은 강의라고 해도 그 의욕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이 '좋은 교수님'을 고르는 기준이 '바뀌어야만' 한다.

만약 모든 학생들이 좋은 교수님을 고르는 기준이 얼마나 강의가 알차고 진실되느냐에 있다면 우리 대학의 수준이 어마어마해질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교수들의 학점인심에만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씁쓸한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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