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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 나갔다가 밭고랑에서 잠든 우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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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많으면 그 일에 파묻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하루를 허무하게 지낼 때가 있다. 아침 이른 시각부터 저녁 늦은 때까지 내 앞에 괴물처럼 버티고 서서 흐물흐물 웃는 그 놈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내 손에는 또 다른 일이 들러붙는다. 변신술도 뛰어나 별별 제목의 공문으로 내 곁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놈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녀석들이 잔뜩 서있다. 교무실에만 있다보니 자꾸만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같아 운동장으로 나왔다. 노란 개나리는 노련한 화가가 넓은 붓으로 죽죽 그려놓은 듯 무리져 피어있고, 목련은 그가 세밀한 붓으로 툭툭 찍어놓은 듯 하얀 꽃망울을 가지에 매달고 있다. 여린 이파리를 물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도 보인다. 화사한 봄 햇살 아래 체육 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봄꽃보다 더 밝다. 축구공을 몰고 빨간 기둥을 돌아가는 아이의 서툰 모습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투명하게 높다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가 흐드러진 햇살이 아까워 그늘 밖으로 나왔다. 이미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고있는 비둘기 가족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다. 햇살 머금은 은빛 물결이 수면에 가득한 호수에서 한없이 앉아 있고 싶기도 하고, 포도(鋪道)를 살짝 적신 새벽길로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차를 몰아 전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그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다. 겹벚꽃 흐드러진 절 마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스님을 만나 고요히 머리 숙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몸을 스치는 바람결이 부드럽다. 낮 기온도 적당히 기분 좋을 만치 따뜻하다. 양지 녘에 앉아 수유꽃 향기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치 없는 비둘기 놈이 ‘구구’ 소리로 나를 깨운다. 잠시나마 여유를 찾았으니 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의 여유로움이 전해졌을까, 동료 교사들의 표정이 한결 여유 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나누어주는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힘을 얻어 교실에 들어간다.
“선생님, 참 바쁘신 것 같아요.” 아이들의 첫마디가 나를 미안하게 한다. 안 그래도 우리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미안하다. 잘못했구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이렇게 사과를 하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우리 참 예쁘지요?” “왜?” “선생님이 그렇게 바쁘시지만 우리들 공부 열심히 하잖아요.” 일에 짓눌린 마음이 일순간 모두 사라졌다. 우리 아이들은 나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힘들 때면 힘을 주고, 기쁠 때 함께 하는 예쁜 천사이다. “그래. 맞다. 너희들 참 예뻐.” 아이들의 함박 웃음이 온 교실을 가득 메우고 나의 마음에도 웃음이 송골송골 맺힌다. 스물 아홉 송이의 예쁜 웃음꽃이 내 마음에도, 온 교실에도 환하게 피었다. 확연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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