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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3 10:09 수정 : 2006.04.03 10:09

왼쪽이 큰 아이, 중간 둘째, 오른쪽은 사촌

요즘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원치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겨울방학동안에 나름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던 아이들이 개학과 더불어서 학교와 학원 공부 외엔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불안해서 공부 좀 하라고 충고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부모와의 마주침을 점점 피하는 눈치다.

이젠 나도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의 모습을 하고 말았다. 나만은 그런 무지막지한 부모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는데 어느 덧 아이들의 성공이라는 명분아래 아이들의 자유로운 삶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에 저들의 삶을 억압할 권리가 정말 내게 있을까?

아이들의 성장을 명분으로 삶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의 모습은 오늘날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안에 나 스스로 거대한 리바이어던(성경에 나오는 바다 괴물로 토머스 홉스는 거대한 국가의 실체를 이 괴물에 비유하는 사회계약이론을 발표하였음)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 정책이 구성원들로 하여금 정치적, 사회적 권리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 물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권리의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궁극적인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발전 초기에는 다소 그 권리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라는 논리로 인내심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여 나중에 좋은 대학에 가면 그 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부모의 모습처럼, 경제적 발전이 있어야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더욱 더 확대될 것이라는 논리 하에 발전 과정에서 부가되는 억압과 희생을 참으라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은 우리를 설득한다. 때때로 그러한 설득은 많은 시민 사회에서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수많은 인권의 억압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애덤스미스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그런 논리로 사회를 이끌어 왔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당했다. 그럴지라도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는 그 날을 위해 그 희생을 인내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는 날은 멀기만 한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대중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가 확대되기 보다는 양극화의 심화로 대중들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래도 발전이 권리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의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경제발전 프로그램이 주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경제발전의 핵심 가치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 프로그램은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다 온건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발전이 권리의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센의 견해는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과 그들의 자유이다. 발전의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닌가? 발전이란 끊임없이 문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현상이다. 발전이란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문명의 이기(利器)라도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이기(利器)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명은 발전의 궁극적 목적을 빗나간 것이기 때문에 발전이 아니다.

따라서 발전의 명분은 권리와 자유에 있다. 구성원들의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발전이다. 따라서 경제 발전 프로그램은 이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진행되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급진적인 방법 보다는 온건한 접근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티아 센의 설명이다.

결국 오늘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각종 경제발전 정책은 목적에서부터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 블록과의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세계 시장에서 피터지게 싸워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는 우리 방식의 신자유주의 이론이 정말 타당한 것인가? 우리는 정말 이 치열한 레드 오션의 세계 속에서 투쟁해야만 하는가? 150년 전 애덤스미스의 망령 앞에 여전히 우리의 가치와 목적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역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학원을 가지 않았던 일로 큰 아이와 다퉜다. 특기활동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학원에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부모의 권리로 비싼 학원비 운운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꾸짖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부모의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큰 아이는 그 때 학원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난 그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위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선택의 자유라는 그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학원에도 가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난 그런 나의 권한을 넘어서 그에게 부모의 권위로 아이의 권리를 억압했던 것이다. 자유주의의 망령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요 신의 형사 그 자체가 아닌가!

나의 안에 있는 모순된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을 빨리 읽어야겠다. 그리고 큰아이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겠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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