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06 13:43
수정 : 2006.04.06 14:32
2008년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 그러니까 2006년 현재 고등학교 1학년들에게는 내신/수능/논술이 극도의 균형을 이루어, 내신과 수능과 논술 다 극도의 노력을 요구하게 되기에, 3년의 고교시절이 마치 죽음과도 같은 것이 된다는 점에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이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분석가들의 흥미를 유발할지 모르나, 당사자들에게는 이미 몸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이제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들의 관점에서는 실제적 비율의 이해 시도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학원이야 교육보다는 상업적 측면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도 하고 실제의 목적이 [입시]에 있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참교육을 주장하는 전교조는 물론이고 다양한 교육수요자의 욕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고심하는 교육부, 그리고 나름대로 여론과 당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대학당국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대해서 순순히 동의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보편적 관점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미덕이다. 편벽/편견/편협하지 않고 대상과 사안의 이모저모를 다 아우를 수 있는 균형감은 쉽게 나오지 않다. 갈등 세계에서도 균형은 힘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양쪽을 아쉽게나마 다 포괄할 수 있는 것인데, [완벽한 균형]에 이르렀다면, 그건 상찬이 아깝지 않을 지혜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은 그 앵글에 들어가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희망의 균형이 아니라, 벗어나기 힘든 고통의 균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사회에서 입시 문제는 입시 문제가 아니다. 축자적 의미로 입시라는 말은 중성적이다. 입학시험은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고, 발달과 성장 과정을 거치는 의미 있는 단계로 볼수 있다. 고교 과정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이 문제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입시라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어의를 획득하고 있다. 한 인간의 인격적 성장이라는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다. 이 말은 한 줌도 안 되는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말이다. 파편화된 지식의 총합을 일컫는다. 규격화된 문제 풀이 해결능력을 일컫기도 한다.
나아가 이 말은 신분상승의 배타적 경로의 뜻으로 전이된다. 또 경쟁사회의 유리한 위치선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 입시라는 개념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과 깊이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나를 넘어선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마저도 몇 시간의 봉사활동으로 계량화시킨 사회에서는 인격과 지혜는 뒤로 가고 남는 것은 각박하고 편벽하고 편집증적인 [배타적 승리]만이 남는다.
사람 사는 세상을 공시적 통시적으로 보는 시각을 완성하기도 전에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지식습득을 통해, 미로 같은 문제의 답을 찾는 능력을 측정하여, 입시를 통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을 때, 과연 온전한 인격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입시는 블랙홀과 같은 장력을 지닌다. 가슴 아픈 것은 입시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고자 기대하는 서민과 빈민계층의 자녀들에게는 입시가 그나마 가능한 신분 획득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현실은 갈수록 낙타의 바늘 구멍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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