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다. 각 도를 통치하는 관리를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 했는데, 관찰사는 일반 행정업무뿐 아니라, 사법과 군사일도 맡았다. 각 도에 속한 병사들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육군을 지휘하는 관리를 ‘병사’(병마절도사), 수군을 지휘하는 관리를 ‘수사’(수군절도사)라고 했다. 병사와 수사의 정원은 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정원이 1명인 경우는 관찰사가 겸했으며, 2명 이상인 경우는 관찰사 외에 별도로 병사나 수사를 두었다. 남쪽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 왜구의 잦은 침탈을 당했던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사 정원은 3명이었다. 따라서 2명의 수사가 별도로 임명되었는데, 이들 수사는 각각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담당했다. 서울인 한양에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전라도는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로 좌, 우도가 나뉘었다. 이순신이 담당한 전라좌도에는 금산, 무주, 전주, 남원, 함양, 순천, 여수 등이 속했으며, 원균이 담당한 경상우도에는 성주, 고령, 문경, 합천, 함양, 남해, 거창, 하동, 창원, 거제, 진해 등이 포함됐다. 전라좌수영은 지금의 여수, 경상우수영은 충무에 진을 두고 있었다.
수군절도사의 품계는 정3품이었다. 조선시대 정3품의 높은 품계 이상을 대청에 올라가 의자에 앉아서 왕과 같이 정사를 논의할 수 있다는 뜻에서 ‘당상관’이라고 불렀다. 이 중 정2품 이상을 ‘대감’, 정3품과 종2품을 ‘영감’이라고 불렀다. 관찰사가 정2품이었으므로, 거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수군절도사도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던 셈이다.
각 도별로 별도의 지휘관이 병사를 지휘하는 체제는 대규모의 전쟁에서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연합부대를 만들었으나 지휘관들의 의견이나 각 도가 처한 상황의 차이 때문에 효과적인 작전을 전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일어나곤 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병사를 체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래서 전쟁이 길어지고 일본군에 대한 반격이 본격화하면서 1593년 경상, 전라, 충청도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기존의 수사보다 높은 2품의 벼슬이었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이 투옥된 다음에는 원균이 그 직책을 이어받았으며,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난 다음에는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보통 경상우수사가 수군통제사를 겸직했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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