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6.18 17:27 수정 : 2006.06.21 17:26

책꽂이/황새울

난 황새울에 살어.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있는 들녘이지. 열일곱살에 시집왔을 때 시어매는 다짜고짜 황새울 들판으로 끌고 절을 하게 했지. 거기서 키운 나락으로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옷을 해입는다며. “저 땅이 우리 집 가장 큰 어른인겨.”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해.

난 행복했어. 황새처럼 하얀 옷을 해 입고 들판에 나가 일을 했지. 수확한 콩을 길에 널어 놓았다가 해거름 질 무렵 거둬들이는 사이에 이만저만해서 아이도 낳았지. 자식 셋을 키우는 사이에 논도 두어 마지기 더 샀어. 행복이란 게 이런 건가 싶더라구.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들이 오더니 봉분마다 불을 질렀어. “죽어도 선산만은 내줄 수 없다”는 남편을 끌어가고 나를 땅바닥에 패대기쳤지. 대일본제국의 비행장을 건설하겠다는 거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천벌을 받을 거라 했어. 일본은 결국 전쟁(태평양전쟁)에서 지고 말았지.

활주로를 곡괭이로 파고 굳은 땅에 물길을 터주니께 물이 짜르르 흐르고 금세 황새들이 찾아왔어. 그런데 몇년이 안가 이번엔 한국전쟁 통에 미군이 와서 비행장을 짓겠다고 난리를 쳤어. 불도저와 포크레인으로 봉분을 파헤쳤지. 모두들 자기 산소를 찾느라 아수라장이 됐어. 포크레인으로 집도 모조리 부숴 버렸지. 어찌나 울었던지 모두 목이 쉬었고, 눈물이 말라 얼굴이 하얗게 변했어. 사람만이 아니라 땅도 울었어.

하루에 몇명씩 아이와 노인들이 죽어나갔어.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며 움집 같은 임시 거처를 만들고 비행장 주변 땅을 일구기 시작했지. 아무렇게나 밟고 다닌 군인들의 발자국과 자동차 바큇자국, 시꺼먼 기름 찌꺼기들이 흉터처럼 새겨진 황새울에서 사람들은 자식의 상처난 가슴을 어루만지듯 땅을 달래기 시작했어. 다행이 황새울은 기운을 되찾았고 황새도 돌아왔지.

세월은 빠르게 흘렀어.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됐고 나도 아흔을 바라보지. 3형제 공부시키고 장가 보내느라 쉴 틈이 없었지만 모진 세월 넘어 오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라. 얼마전엔 생일이라고 아들, 손주, 며느리, 동네 사람들 다 모여 잔치를 벌였지.


그런데 날벼락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어. 잔치판에 양복입은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군기지 이전 터로 확정됐다고 말하는 거여. 세월이 그토록 지났건만, 또다시 황새울을 없애야겠다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정도가 심장이 덜컥 멈춰버릴 것 같아.

분명히 말하는데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싫어. 어떻게 빼앗겼고 또 어떻게 되찾은 땅인데…. 한두번은 경황이 없어서 그랬지만, 세번씩이나 빼앗길 순 없지. 황새울이 지깟 놈들한테야 별볼일 없는 땅뙈기일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아녀. 모진 아픔과 고통, 슬픔의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살 자리를 뺏는 나라가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겨. 아무리 미국이 힘이 세다고 해도 이건 아닌겨. 나라한테 기대하는 것 없으니께 수십년 갖은 노력 끝에 일궈낸 터전 좀 제발 그냥 내버려 둬. 제발, 제발…. <황새울> 정대근 글, 노순택 사진. 리젬/7500원.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