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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가락에 교훈담은 '창가' 초기 애국가도 형식 이어받아 |
애국가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애국가를 사용할 때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데 대해 반감을 보이기도 하고, 애국가도 개인이 지은 것이니만큼 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애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애국가는 대한제국 때부터 전해지던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전 애국가는 창가의 형식으로, 주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에 맞춰 불려졌다. 새삼 창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대목이다. 창가는 가사가 발전된 형태로, 1890년대부터 보급됐다. 원래 ‘가사’는 고려 말에 나타나 조선시대에 발전한 것으로, 일정한 글자 수를 유지하면서도 시조보다 긴 내용을 가진 글이나, 이를 노랫말로 삼아서 장구나 대금, 피리 등 국악기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가리킨다. 개항 이후에는 가사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문명을 노래한 개화가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음률은 가사의 흔한 형태인 4·4조 외에, 7·5조나, 8·5조, 6·5조 등 다양한 형식을 띠었다. 이 개화가사가 발전해 창가가 됐다.
이전 가사가 필요에 따라 다양한 가락에 맞춰 노래를 했던 반면, 창가는 일정한 곡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가사와는 달리 악보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가에 사용되는 곡조는 이전 민요의 가락을 따른 것도 있고, 찬송가와 같은 서양 곡조에 노랫말을 얹은 것도 있다. 처음 창가를 소개한 것은 <독립신문>을 비롯한 언론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 들어 학교에서 창가가 불리면서 크게 확산됐다.
창가의 내용은 <세계일주가>, <경부철도가>, <권학가>, <학도가> 등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계몽 의식을 기르거나 학문을 권장하고, 청소년의 기개를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 많았다. 황제의 탄신을 축하한다든지, 한반도나 무궁화, 한양을 찬미하는 것들도 있었다. 애국가도 이러한 성격을 가진 창가의 일종이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국권을 빼앗겨 가는 과정에서 역대 한국사의 위인들을 소재로 하거나,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강조하는 등 항일이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창가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910년 일본에 완전히 병합된 다음, 항일적인 성격을 지닌 창가는 독립군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자연을 예찬하는 등 일상적인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담은 관변 창가로 바뀌었다. 이후 창가는 점차 신식 노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모호해졌으며, 유행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로 했다. 결국 하나의 시문학 형식으로 정착되지는 못한 채, 1920년대 들어서는 대중가요로 바뀌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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