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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30 21:01 수정 : 2006.07.31 18:38

아낌없이 주는 나무

무제치늪은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 무제치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도 있겠다. 그러나 늪 바로 위의 봇골재에서 물싸움이 벌어지곤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해발 530미터 산위의 물싸움이라니 기이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용 바위 밑에서 물이 펑펑 쏟아졌고, 산 이편과 저편의 면민이 서로 물길을 끌어가려 다투었다. 수리 시설이 발달하기 전에는 그랬을 만도 하다. 관할 지역이 아니었던 산 너머 사람들은 번번이 도망을 가면서도 흙을 한 삽씩 퍼 갔고, 때문에 그편이 지금도 좀 낮단다. 그러다 관할 지역 현감이, 이쪽은 물이 넉넉하고 저쪽은 귀하니 물길을 그리로 터주라 권유하여 오랜 물싸움은 막을 내렸다. 네 구역 내 구역이 아니라, 천리와 인도를 먼저 헤아렸던 현감이 참 어질고 지혜롭다.

고향의 면지(面誌)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비전문가들이 만든 소박하고 투박한, 그러나 삶터에 대한 사랑과 긍지가 가득한 이 책에는, 근대의 멋진 역사도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검거된 스물세 살의 마을 이장은, 다시 선동치 않겠다는 각서만 쓰면 보내준다 하여도 “내 나라 위해 만세 부름이 어찌 죄인가”고 호통을 쳤다. 뭇매 뭇 고문에 혼절을 거듭하면서도 “나는 할 일 다 했다, 아들도 셋이나 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외쳤다. 숨만 간신히 붙은 그 어른이 풀려날 때, 경북 월성에서 경주까지는 월성 군민이, 경주에서 경남 언양까지는 경주 군민이, 언양에서 본가까지는 언양 군민이 가마로 모셨다. 금강석 혼도 눈부시려니와, 고귀함에 대한 마땅한 경의를 알았던 풀잎 영혼이 얼마나 지순한가!

그러나 내가 이 책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생의 ‘공간과 시간’이 그 속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신화, 전설, 민담, 민요가 아니라, 나와 무관한 전통, 역사, 풍속, 자연이 아니라, 일찍이 만났으나 미처 그 이름과 의미를 알지 못하였던 것을 비로소 확인하고 헤아리는 기쁨과 고마움 때문이다.

공부도 나와 관계가 있을 때 더욱 절실해진다. 남들의 책을 접어두고, 올 여름엔 아이와 함께 고향산하를 새로이 만나보면 어떨까. 지금 사는 마을에서도 그 일은 물론 가능하다. 우리 땅 방방곡곡 이야기와 노래와 역사와 삶이 살아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단, 아이를 자꾸 가르치려 하지 말고, 풍성한 체험을 선물하는 데 마음을 쓸 일이다. 이름과 의미는 만남 이후에 오느니.

선안나/동화 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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