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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6 19:24 수정 : 2006.08.07 17:20

작가는 소록도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당신들의 천국’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의 길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실패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내려 애쓴다. 사진은 한센인 마을이 있는 소록도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문학 속 철학산책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본 ‘디스토피아’의 의미

1984년 발표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디스토피아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시도가 빚어낸 어두운 그림자, 곧 ‘실패한 유토피아’를 말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특정한 디스토피아를 고발하는 작품은 아니다. 이 점에서 <당신들의 천국>은 대표적 디스토피아문학인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동물농장>, <1984년> 등과 분명 구분된다.

환상 속에 감춰진 어둠을 찾아내어 고발하는 것도 결코 쉬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조차 남아있어야만 하는 빛을 찾아내어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당신들의 천국>이 그 어려운 일을 시도했다. 비록 나환자들의 섬 소록도로 한정했지만, 이 작품은 유토피아를 향해 나가려는 우리의 길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어떻게 하면 실패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려 애쓴다. 그래서 귀하다는 것이다.

한번도, 단 한번도 세상에 천국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럼에도 ‘당신들의 천국’만은 항상 있었다. 전제국가의 왕들, 봉건국가의 제후들, 자유주의 국가의 자본가들, 사회주의국가의 당원들, 곧 힘을 가진 자들의 천국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힘없는 자들의 지옥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말에는 ‘우리들의 지옥’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다.

이청준은 냉소적인 제목을 부친 이 작품을 통해 ‘당신들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꾸어가는 길을 보여준다. 주목할 것은 그것이 역사상 행해진 숱한 혁명들과는 달리 ‘지배자의 천국’을 ‘피지배의 천국’으로 바꾸자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의 천국’은 또 다른 ‘당신들의 천국’임을 작가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겠다. 작가는 보다 원대한 꿈과 기획을 이 작품에 실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를 싸안은 ‘우리’ 곧 ‘우리 모두’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려 한다. 그를 위해 세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나름대로의 해법도 제시한다.


우선, 보건과장 이상욱은 자유의 소중함을 내세운다. 그는 천국은 “그 설계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 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의 선택 여부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때문에 그는 소록도 나환자들의 자유에 의해 선택되고 희망된 것이 아닌 천국은 설사 그것이 행복해 보일지라도 오히려 “숨막히는 지옥”이 되어버린다 한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대표인 황희백 장로는 자유에 대해 부정적이다. 자유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싸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내세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구분조차 없는 곳에서만 ‘우리들의 천국’은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이청준의 유토피아공학은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 그가 천국건설의 해법으로 제시한 사랑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적 해법이지 사회공학적 해법이 아니다. 예수나 불타의 말씀이지,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나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오늘날 추진하고 있는 민주주의에는 비록 선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통치자와 통치 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통치가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청준의 유토피아공학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상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 조백헌원장이 민간인 신분으로 소록도에 다시 돌아와 전개되는 3부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조백헌은 유토피아공학으로서의 ‘사랑’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이청준이 구상한 유토피아공학의 실체가 드러난다. 다름 아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운명을 같이 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자유에 의해 선택하고 희망한 천국만이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행복해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천국은, 곧 타인에 의해 설계되고 추진된 유토피아는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사 행복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디스토피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묻자!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청준도 <당신들의 천국> 개정판 서문에서 이제 우리 사회를 ‘우리들의 천국’으로 행복하게 바꾸어 불러도 좋은 때가 온 것인가라고 자문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슬픈 일이지만, 작가는 앞으로도 더 많은 개정판을 내야 할 것 같다. ‘우리들의 천국’이 그리 쉬 이루어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비단 우리 사회의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포기해야할까? 그리고 절망해야 할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우리들의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때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뭐라 불러야 할까? 한번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차라리 우리는 아직까지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천국’에 대해 오히려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향해 부단히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비록 ‘끝이 없는 길’일지언정 그것이 ‘인간의 길’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청소년문학사이트 글틴(teen.munjang.or.kr)의 ‘문학을 위한 철학 통조림’ 게시판에서 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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