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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소록도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당신들의 천국’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의 길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실패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내려 애쓴다. 사진은 한센인 마을이 있는 소록도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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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보건과장 이상욱은 자유의 소중함을 내세운다. 그는 천국은 “그 설계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 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의 선택 여부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때문에 그는 소록도 나환자들의 자유에 의해 선택되고 희망된 것이 아닌 천국은 설사 그것이 행복해 보일지라도 오히려 “숨막히는 지옥”이 되어버린다 한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대표인 황희백 장로는 자유에 대해 부정적이다. 자유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싸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내세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구분조차 없는 곳에서만 ‘우리들의 천국’은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이청준의 유토피아공학은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 그가 천국건설의 해법으로 제시한 사랑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적 해법이지 사회공학적 해법이 아니다. 예수나 불타의 말씀이지,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나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오늘날 추진하고 있는 민주주의에는 비록 선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통치자와 통치 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통치가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청준의 유토피아공학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상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 조백헌원장이 민간인 신분으로 소록도에 다시 돌아와 전개되는 3부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조백헌은 유토피아공학으로서의 ‘사랑’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이청준이 구상한 유토피아공학의 실체가 드러난다. 다름 아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운명을 같이 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자유에 의해 선택하고 희망한 천국만이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행복해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천국은, 곧 타인에 의해 설계되고 추진된 유토피아는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사 행복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디스토피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묻자!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청준도 <당신들의 천국> 개정판 서문에서 이제 우리 사회를 ‘우리들의 천국’으로 행복하게 바꾸어 불러도 좋은 때가 온 것인가라고 자문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슬픈 일이지만, 작가는 앞으로도 더 많은 개정판을 내야 할 것 같다. ‘우리들의 천국’이 그리 쉬 이루어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비단 우리 사회의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포기해야할까? 그리고 절망해야 할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우리들의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때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뭐라 불러야 할까? 한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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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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