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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20 17:27 수정 : 2006.08.21 09:53

아낌없이 주는 나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다. 특히 여고 때 국어 선생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립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쓴 ‘나의 장래 희망’을 읽고, 왜 꿈꾸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책이 아닌, 진짜 사람에게서 그런 얘길 듣긴 처음이었다. 꿈이라니? 어떤 충격과 함께 한편으로 저항감도 느꼈다. 무슨 꿈을 어떻게 꾸란 말인가? 현실적인 비전이 없는데?

당시 마을의 남자아이들은 중학교 졸업 후 대부분 도시로 ‘유학’을 떠났지만, 여자아이들은 근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다행이었다. 나 역시 맏이인 아버지가 동생들 뒷바라지 하는 모습을 계속 봐왔고, ‘공부시켜야 할’ 남동생도 셋이나 있었기에, 감히 어떤 꿈도 꾸지 못한 채 가까운 상업학교에 그럭저럭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했고, 자격증을 따서 취직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여선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꿈을 우리에게 요구하였다. 열일곱 살, 파르라니 예민했던 내 마음에는 ‘선생님, 당신이 우리 현실을 압니까?’ 하는 거부감이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과 나는 한권의 공책을 공유하게 되었다. 내 습작노트에 선생님이 긴 글을 써서 돌려주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파란 잉크의 만년필로 쓴 달필의 글씨 속에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보낸 선생님의 유년이 먼 이국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뒤 이어 내가 쓴 글을 선생님이 다시 읽고, 한참 뒤 새 글을 써서 돌려주는 방식으로, 공책은 선생님과 나 사이를 가만히 오갔다. 반 아이들에게 굳이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알려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 일은 자연스럽게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그건 창작 지도가 아니라 문학 교류였다. 아직 어리고 미숙한 제자였으나. 선생님은 나란한 자리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심껏 진솔하게 보여주었다.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이해와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내게 자신감과 안정을 주었다. 내 ‘꿈’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곳에 씨앗처럼 묻혀 있었지만, 선생님은 그 씨앗에 빗물 같은 사랑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또 어떤 선생님들을 만나게 될까? 그들이 미처 모르는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바라봐주고 믿어주는 분을 보다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타인이 발견해 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사람들은 그만큼 성장해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선안나/동화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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