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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민교육 교과서는 ‘정의’, ‘책임’ 등 추상적인 개념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 프랑스 초·중등 시민교육 교과서는 신문 기사와 사진, 통계 등 풍부한 자료와 한 두 개의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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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흔한 상황 예들어 합리성 지닐 때까지 토론 민주의식 자연스레 몸에 배
시민교육 관심 큰 국내 교사들 외국 교과서 번역…다음달 보고서
#1. 아이가 집에 돌아오더니 “엄마가 준 돈으로 친구랑 아이스크림 사먹었어. 내일은 그 친구에게 사달라고 할 거야”라고 말합니다. 친구와 나누어 먹었으면 그만이지, 왜 내일 꼭 사달라고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래야 공평하잖아. ” 내가 준 것을 똑같이 남에게 받아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야기하려다 훈계로 끝날까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대신 <아름다운 가치 사전>이라는 책을 함께 보면서 정의, 배려 같은 단어의 의미를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 책에는 “공평이란 놀이기구를 탈 때 줄을 서서 기다린 순서대로 타는 것”이라고 나와 있답니다. -박은영(어린이 독서도우미 ‘파란흙의 세상읽기’회원, 초등생 학부모)
#2. 학급회의 시간에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되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따른다’는 원칙이 민주사회의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법이라는 점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사건을 지켜보던 나는,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의견을 가진 두 집단 대립할 때, 가장 유효한 의사결정 방식은 무엇인가? 소수 의견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모습을 본 뒤, 나는 청소년의회에 참여해 이런 궁금증을 직접 해결해 보기로 했다. - 대한민국청소년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인 한 학생의 글
모름지기 민주사회 시민은 자유와 평등,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고 배운다. 사회시간에는 이런 내용이 ‘헌법’에 보장돼 있다고 배우고, 도덕시간에는 이러한 가치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배운다. 그러나 현실은 교과서와 달리 매우 복잡해서, 개념을 익히고 덕목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평촌공업고등학교 김원태 교사는 실업계 고교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악덕 기업주에게 임금을 떼이거나 여름방학 현장 실습 기간에 다양한 노동 문제와 부닥칠 때, 공정한 것과 부당한 것을 구별하고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존 사회 교과서는 인문계 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치르기 위해 외야 하는 각종 ‘개념’과 ‘절차’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노동’ 혹은 ‘노동권’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실업계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교과서에서는 ‘노동’과 관련된 별도 단원이 없다. ‘사회법에 노동관계법이 있다’(중학교 2학년)는 대목과 ‘(시장경제의 특징을 설명하는 단원에서 )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중학교 3학년)는 대목 등 구체적인 설명없이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을 다 합쳐도 전학년 통틀어 1쪽 분량이 채 안되는 상황이다. 이것저것 자료를 모으던 김 교사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스웨덴 등 서구 여러나라에 노동, 인권, 연대, 정의, 평등 등을 주요 단원으로 하는 ‘시민교육’이라는 교과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 교사들은 정부에 시민교육교과 신설을 촉구하면서, 시민의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떤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는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프랑스에 이어 영국이 2001년부터 중고등학교 시민교육 교과를 개설하는 등 최근 서구에서는 이러한 시민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그가 보기에, 서구 시민교육 교과의 가장 큰 특징은 정의, 연대, 인권, 평등과 같은 추상적 가치가 실제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와 질문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미국 중학교 시민교육 교과서에서는 ‘정의’와 관련해 이런 질문이 나온다.
“상황 1. 여러분이 학교 농구팀 선수라고 상상해보세요. 팀 주장은 여러분은 벤치에 앉혀놓고, 여러분보다 실력이 뛰어나지 못한데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상황 2. 어떤 음악예술학교에서는 가장 적은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만을 학생으로 모집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 3. 어떤 지방정부에서 호수 주변의 집을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훌륭한 수영선수이거나 보트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호수의 장점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위 상황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의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정함’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관련해 공정함을 넘어서는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책 한 권 분량으로 이루어진 ‘정의’단원은 학생들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스스로 ‘이것이 정의다’라는 의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되, 그 의견이 충분한 정보와 합리적인 사고의 산물이 될 수 있도록 ‘연습’ 시킨다. 또 다른 특징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분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언급한다는 점이다. 프랑스 시민교육 교과서는 노동자들의 시위나 파업, 법률 분쟁,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논란 등을 담은 각종 자료와 사진으로 가득하다.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다루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는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힘겨워하는 한 판사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 옆에 나란히 놓인 것은 억울한 판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단원에서 이야기해 볼 주제는 ‘프랑스 사법부는 적체 문제로 고민이 많다. 한편 이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시민들도 많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다. 미디어에 대해 배우는 단원에서, 영국 교과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언론을 통해 어떻게 교묘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유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 내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실험을 제안한다. 김 교사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오히려 쉽고 재미있게 다루면서 갈등과 분쟁이 민주 사회에서 언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이를 조정하고 해결할 책임이 시민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서구 시민 교육의 공통점”이라고 말했다. 노동, 연대, 인권 등 구성원의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한 적게 언급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김 교사는 지난해 9월부터 자양고 송용구 교사, 공항고 이인석 교사, 관악고 정문모 교사 등 시민교육에 관심있는 전국 사회 교사들 20여명과 더불어 ‘시민교육교과 공부모임’을 꾸려 19차례 모임을 진행했다. 당장 교과목을 신설할 수는 없더라도, 서구 시민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고 국내 학교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보조 교재, 혹은 대안교과서를 만들어 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 첫 단계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세계 5개국 시민교육 교과서 번역 작업이 이제 막 마무리됐다. 국내에서는 첫 선보이게 될 ‘외국 시민교육 교과 운영 현황과 교과서 분석’보고서는 오는 9월에, 이를 토대로 쓰여질 한국 시민교육교과서는 내년 초쯤 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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