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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22 15:51 수정 : 2006.08.22 15:51

위 그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홍도의 풍속화이다. 가끔 교사의 매질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용(誤用)되기도 한다. 그림을 유심히 보자. 전반적 풍경은 서당에서 종아리 맞은 직후의 모습이다. 맞은 녀석은 눈물 훔치며 대님을 고쳐 매고 있고 나머지 8명의 학동들은 웃고 있다. 훈장의 표정 또한 다소 난감한 듯 하면서도 예의, 웃음을 참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친구가 맞는데 웃고 있다? 애를 때리고도 웃는 선생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비교육적이고 몰강스러운 그림이 된다. 과연 그럴까?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세기로 훌쩍 날아가야 한다. 동리마다 서당이 있고 그림처럼 10명 남짓의 학동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시절 말이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몸집이나 차림새를 보면 지금처럼 나이 중심의 학제가 아닌 진도위주의 편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자문이고 동몽선습이고 학습수준이 비슷한 학생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다소 왜곡된 시각으로 본다면 우열반의 시초라고 할까? 기실 작금의 교실문제도 학력편차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어쩌라는 것인가. 당연히 조리치는 아이도 있고 옆 친구에게 장난 걸게 마련이다. 주위산만이니 AHDH니 하면서 아이들을 장애아 취급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아이들을 집중하게 만들 책임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있다. 선결조치로 교실 내에서의 교권 또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너무 이상적인 논리인가?

그림에는 회초리나 목침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폭력도구가 생략 된 것이다. 주변 사물 자체를 생략한 그림이니까 회초리나 목침 또한 생략되었다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필자는 김홍도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구태여 회초리를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림이 나타내려는 것이 매질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교감(交感)이 바탕 된 상태에서는 폭력도구나 자극적 상황이 무의미하다. 죽어라 때리는 것도 아니고 맞아 죽기야 하겠냐는 반항도 아니다. 훈장은 측은지심을, 학생은 죄송함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이런 체벌이라면 어느 부모인들 마다하겠는가.

당시는 지금보다 집합촌의 규모도 작았고 응당 학생 수도 많지 않았다. 몇몇을 가르치는데 지금처럼 두들겨 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학부형과 수시로 마주치는 상황에서 아이들 종아리를 퍼렇게 만들 만큼 어리석은 훈장도 아니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수십 명을 상대해야 하는 폭력교사의 고충도 짐작 간다. 그러나 폭력은 역시 방법이 아니다. 폭력을 금지하라는 사회적 요구에 교사와 학교당국은 대안이 무엇이냐는 항변을 하곤 한다. 세상에, 폭력의 대안이라니. 폭력은 대안을 찾을 명제가 아니라 당연히 금지되어야할 행위이다. 폭력대안을 위한 공청회 따위를 연다는 자체도 모순이다. 교내질서를 위한 공청회라고 해야 한다. 때리지 못하게 하니까 다른 방법을 쓰겠다는 발상으로 어떻게 올바른 교육이 되겠는가. 우리는 근본 개념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 ‘폭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라. 반대말도 없고 상대어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실분위기를 이끌어 갈 것인가. 일단 교사의 자질이 우선시된다. 말 잘하고 아이들 심리파악에 능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연예인이 되라는 말이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래야 한다면 연예인 흉내라도 내야 한다. 대중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기술은 교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에서도 프리젠테이션에 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모르는가. 교실 내에서 절대 권력자였다는 향수에서 빨리 벗어나기 바란다. 물론, 학습능력에 대한 편차가 크기 때문에 공통의 관심사를 유지한다는 자체도 불가능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교사의 능력이고 재량이다. 사교육이 들불처럼 번진 현실 앞에 학교공부만으로 지식을 충당하는 학생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교육 때문에 공교육이 붕괴되니 어쩌니 언구럭 부리지 말자.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학원을 허구한 날 들먹이면 뭐하겠나. 전두환이 재집권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입시학원은 사라지지 않는다. 절망적이라도 인정할 건 냉정하게 인정해야한다.

학교가 재미있는 곳이어야 한다. 선생님과 유쾌한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학교 빠지고 자전거 훔치러 갈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그 아이들이 가정적으로 소외되거나 결손상태라면 더 보탤 것 없다. 교사들에 대한 강의교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재미있게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해야 마땅하다. 잘하는 아이를 기준한 학습과, 못하는 아이를 염두에 둔 분위기 유도가 음성다중방송처럼 진행되어야 한다. 자기개발에 충실하지 않은 사회인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학교라고 다르겠는가. 철밥통도 자주 닦아야 빛이 나는 법이다. 아울러 폭력교사는 반드시 퇴출되어야 한다. 교원양성과정에서 걸러내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언제, 누구에게 폭력적으로 돌변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폭력이 벌어졌을 때 퇴출시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학생들은 어떤가. 학생의 본분을 다하라고 눈 부라리면 되는 일일까? 네 성적에 잠이 오느냐고 빈정댈까?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하고 선택하라 할까? 한숨 자는 오늘이 한숨 쉬는 내일로 이어진다 겁줄까? 몇몇은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잔다. 핸드폰 문자팅에 열중인 녀석들도 있다. 셀카 찍는다고 이리저리 얼굴 돌리는 아이에게 뭐라고 해줄까.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죄가 없다. 무심하거나 성적만 채근하는 부모가 문제다. 대학 아니면 당장 죽을 양 호들갑떠는 세상이 유죄다. 학생을 인격체로 보려하지 않는 일부 교사 책임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 아이들이고 청소년이다. 어른들이, 모두가 부모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존조리 타일러야 마땅하다.

가장 절실한 문제는 예산 즉, 돈이다. 학급당 인원수가 20명 이내라면 교사가 집중시키기 수월하고 능력별 이원수업도 가능하다. 5명 이내의 학원은 학습이 원활하지만 대규모 학원은 분위기 엉망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학급을 늘리고 교원도 보충해야 한다. 공부에 취미 없는 아이들이 다른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와 연계한 특별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공부가 싫다고 해서 만사 다 싫은 아이들은 아니다. 그림을 좋아하기도 할 것이고 기계공작에 소질이 있을 수 있다. 처음부터 실업계로 몰아내자고 하지는 말자.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을 어른 기준으로 갈라내서야 되겠는가. 재원은 결국 정부 몫이다. 빈곤층 지원 이외에는 교육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그토록 목매는 명문대학도 세계적 기준으로는 변두리 삼류 아니던가.


한때 점수제를 도입한 적 있었다. 벌점 주어서 누적범위에 따른 불이익을 주겠다는 발상이었다. 결국 흐지부지 물 속 방구처럼 되고 있다. 해당 학부모의 로비도 있었겠지만 학교당국의 철저한 시행의지가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스승이니 공정하게 관리하고 몽둥이 휘두르듯 냉정하게 집행했다면 이 또한 자리 잡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학생을 관리대상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제도였다.

부모는 가정에서 가르칠 책임이 있다. 내 아이가 밖에서 어떤 모습인지 지혜롭게 판단해야 한다. 주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교사는 당장에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핑계 삼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학생 수를 내년부터 반으로 줄일 수 없지 않은가. 사회도 공적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저녁 황금시간대에 가정교육에 관한 공익방송이라도 해야 한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공동책임을 통감하는 것만이 대안이다. 당장 체벌을 금지한다 해서 학교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폭력은 당장 금지해야 한다. 폭력이란 대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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