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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25 20:03 수정 : 2006.08.25 20:19

교육위원 된 이부영 위원장,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그는 “첫 수업 때처럼 떨린다”고 했다. 31년 동안의 교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자리였다. 분필을 든 손은 떨렸고, 힘찬 목소리에도 나지막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난달 제5기 서울시교육위원에 당선된 이부영(60) 전 전교조 위원장. 그는 25일 서울 경기기계공고에서 마지막 수업을 가졌다. 지난해 복직한 뒤 1년 6개월 만에 다시 교단을 떠나게 됐다. “굉장히 서운하고, 아쉽다”고 했다. 31년 동안 해직과 복역, 전교조 간부 활동 등으로 복직과 휴직을 반복했다. 교직 생활의 절반에 가까운 14년을 학교 밖에서 보낸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교육위원이라는 외부 활동으로 학교를 떠난다. 하지만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다. 4년 임기를 마치면 나이가 정년을 넘어 버리기 때문이다.

교육 운동을 언제 했냐는 물음에 그는 대뜸 민요 얘기부터 꺼냈다. “국어 교사로서 민요에 관심이 많았어요. 원래 대학 땐 소설도 곧잘 쓰는 문학 청년이었죠. 교사가 되고 나서는 학생들과 ‘민요 한마당’ 같은 행사를 열 정도로 민요에 빠졌어요.” 그는 83~4년엔 신경림 시인이 주도한 ‘민요연구회’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교사모임 회장을 맡았다. ‘사랑~ 사랑을 하려면 요~ 요렇게 한단다~’로 시작되는 민요 ‘사랑가’가 이 시절 공동 창작됐던 민요라고 했다.

억압과 저항이 넘치던 80년대,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도 활발했다. 그는 민요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사회적 흐름을 공유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 해 86년 교사들도 교육민주화 선언을 했다. 그는 여기에 참여했고, 전교조 탄생의 주춧돌이 됐다. 88년 서울교사협의회장을 했고, 89년엔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고 구속됐다. 이때부터 그는 우여곡절 많은 전교조의 산증인이 됐다. 89년 서울지부장을 하면서 다시 수배됐고, 20개월 넘게 복역했다. 98년 서울 북공고에 복직한 그는 99년과 2000년 합법화된 전교조의 첫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대학 시절 국문과를 다녔고, 교직을 이수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사가 됐다고 했다. 첫 부임지는 경기도 대부 중학교. 지금은 연륙교가 놓여 육지나 다름 없지만 당시엔 인천에서 배로 1시간 반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섬마을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대학 때 동인지 활동까지 했던 그에게 딱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요즘 전교조에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그는 “의도를 가진 비판, 비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교조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자 공적 기구인데 생각이 다르다고, 그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득될 게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진경 전 청와대교육문화 비서관과 김귀식 전 전교조위원장 등 최근 전교조에 쓴소리를 한 예전 동지들에 대해서는 “진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최근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전교조에 대한 따뜻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누구나 잘못을 하고 그 부분에 대해 비판을 받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활동도 잊어서는 안돼죠. 신자유주의 정책과 싸우더라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부분을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4년간 서울시 교육위원으로 활동한다. 학생들의 먹는 문제와 자치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의무교육이 진정한 무상교육으로 가게 하는 것이 큰 목표고, 그 출발점이 바로 학생들에게 무료로 안전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이는 것이다. 학생들의 자치 조직인 학생회를 활발하게 만드는 것도 그가 재임 중 꼭 해보고 싶은 일이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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